눈꽃이 피고, 공원 언덕에서는 아이들이 씽씽 눈썰매를 타고, 캐시미어 터틀넥 스웨터를 찾게 되고, 우편함에 크리스마스카드가 배달되기 시작한 이 한 겨울에 나는 아직도‘가을’을 살고 있다. 이건 순전히 한 꼬마작가 탓이다. 탓을 하는 김에 확실히 하련다. 시카고 데스플레인즈의 성 정하상 성당에서 운영하는 하상한국학교 태극반의 김천민 어린이가 바로 그 꼬마작가이다.
지난 한글날 글짓기 대회에 이 어린이가 제출한 ‘가을’이라는 글의 문장 하나가 나를 가을에 붙들어 놓고 있다. ‘가을’을 복사해서 다이어리 갈피에 끼워 가방에 넣고 다니며 기차 안에서 꺼내 읽으며 혼자 씨익, 웃기도 하고, 만나는 이마다 보여주고 읽어주면서, 시카고 겨울의 한 복판에서 가을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논리가 정연하고, 솔직하고 당당하고 패기가 있으며, 파격적인 끝맺음이 일품인 글이었다. 그래서 나는 작가의 허락도 없이 그의 글을 소개한다.
“가을 오면 학교 시작해요. 가을도 추워요. 학교는 재미없어요. 공부, 숙제와 시험만 해요. 그리고 나는 재미없는 게 시러(싫어)해서, 학교 실어(싫어)해요. 가을은 추워요. 그리고 나는 추운 거 실어해요. 추울 대(때), 나는 생각 못해요. 그래서 학교갈대 추우면, 생각이 잘 안대서 공부도 못하개 대요(되요). 추울 때 학교에서 바개(밖에) 나가게 해요. 이럴 때 어러주굴(얼어죽을) 거 갓해요(같아요). 그거 대신, 너무 더우면 조을(좋을) 거 갓해요. 가을에 당풍(단풍) 나와요. 당풍 보는 게 재미없어요. 당풍은 아무 뜻이 없어요. 겨울 온다고 말하는거 보다 틀린 개 없어요. 가을은 춥고, 학교 있어요. 학교는 재미업니가(없으니까), 가을도 재미없다. 나는 추운 거 시려해니까(싫어하니까), 가을도 시러해요(싫어해요). 가을은 피려없다(필요없다).”<김천민 어린이의 ‘가을’전문>
꼬마작가는 “가을은 피려(필요)없다”라는 선언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이 서늘하고, 패기만만하고, 감상을 거부한 문장에 나는 그만 반해버렸고 아직도 그 문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풍’이면 어떻고 ‘단풍’이면 어떠랴. 작가에게 단풍이 아무 뜻이 없다지 않는가. 단풍은 그저 겨울이 온다는 징조 외에는 아무 뜻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카고의 단풍은 실제 그렇다. 물이 드는가, 하면 어느새 첫 눈이 내리고, 눈꽃이 핀다. 그러니 “가을에는 단풍이 예쁘게 들어요”라던가 “가을에는 하늘이 파래요”라던가“가을에는 추석이 와서 좋아요”라는 표현은 시카고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이 꼬마작가의 당당하고 예리한 글을 읽으며 김훈 작가를 떠올렸었다. ‘칼의 노래’의 저자이자 대한민국 최고의 문장가로 일컬어지는 김훈 작가는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조미료, 향신료, 방부제라고는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은 100% 무공해 유기농 진품문장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겨울방학이 끝나면 나는 하상한국학교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김천민 꼬마작가가 한글 수업 받는 모습을 취재하고 그를 인터뷰할 생각이다. 남에게 보이고 싶은 달착지근한 글이 아니라, 당당하고 명료하고 단단한 글을 쓸 수 있는 기본자세를 배우고 싶어서이다. 이것이 나의 새해 첫 프로젝트이다.
이 영옥
엔지니어·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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