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동쪽에서 떴던 해가 오늘도 동쪽에서 뜬 것 뿐이다.’
며칠 전 중학생이 된 후 십수년간 매일 썼던 일기를 꺼내 보았다. 이 문구(혹은 비슷한 문구)가 매해 1월1일 일기장에 어김없이 쓰여 있었다. 사춘기를 맞으며 인생의 허무함을 혼자 짐진 듯 했으니 새해 첫날을 호들갑스레 맞는 주위가 너무 촌스럽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사람들이 개념에 불과한 시간을 자로 잰듯 똑같은 길이로 토막 내놓고는 너무 감상적으로 다룬다고 생각했었다. 모든 것이 우리의 의지 없이 예정된 대로 움직여질 뿐인데 그따위 시간변화가 무에 그리 기쁠까 싶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따라 종각에 가서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다가 인파에 깔려 죽을 뻔 했을 때는 물론, 그로부터 몇십년이 지난 후인 2001년 첫날의 아침 해를 누구보다 먼저 보겠다고 가족과 함께 울릉도에 갔을 때도, 내겐 그 새 경험들이 흥미로웠던 것이지 새해의 첫날이 흥미로웠던 게 아니다. 나는 예정론에 의해 움직여진 꼭두각시였으니까.
자연의 이치를 수학, 물리학적으로 표현한 ‘시간’에 대한 거부반응이 개똥철학(?)에 빠졌던 사춘기 때 나타났던 것이야 당연한 일지만, 반세기 가깝게 살도록 새해 첫날이 특별나지 않았던 것은 계속 철이 들지 않아서였을까? 세월이 흐르면서 내 개똥철학은 깊을 대로 깊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누구와도 그것에 대해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비밀이어서가 아니라 별로 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 만나 지금까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한국에 있다. 참 많은 것을 나눈 친구라 한참 연락을 못해도 항상 옆에 있는 듯 마음 든든한 친구다. 몇 년 전 우연한 기회에 그에게 내 개똥철학을 말하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울먹이며 평생을 내게 배반 당하고 살았다며 대들었다. 자신이 개똥철학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면 내가 건져주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내 성격이 그 친구마저 내가 삶에 큰 의미를 두고 그것을 즐기며 사는 사람인 줄 알게 만든 것 같다.
그 일은 내게도 쇼크였다. 내가 그 친구를 일으켜 세우곤 했다니. 오히려 내가 그 친구 덕에 일어서곤 했는데. 삶이 삶을 속인다더니, 그 친구나 나나 서로의 삶에 속아 산 것을 반세기쯤 살다가 깨닫게 된 것이다. 앞으론 누가 우리를 일으켜 세우나?
그 일을 겪으며 내 개똥철학에 조금씩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해의 첫날도 조금씩 다르게 다가왔다. 남은 삶의 세월이 지난 삶의 세월 보다 짧게 된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인 것도 같고. 그래서 삶에 미련이 생겼기 때문인 것도 같고. 아니, 삶의 마감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하고 싶어졌기 때문인 것도 같다. 무엇보다도 내 삶과 남의 삶이 얽혀지면서 생기는 다이나믹한 에너지가 참으로 귀하고 큰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직 예정론에서 벗어나지 못해 우리가 각본대로 움직인다 믿어도.
2009년도 첫날엔 누군가의 삶과 얽혀 볼 결심을 한다. 그 결심이 내 의지 없이 이미 예정된 것이라 해도 좋다. 비록 꼭두각시로 움직일지언정, 두 삶이 얽혀서 만들어 내는 에너지만큼은 그 순간 그 나름대로 찬란한 의미를 갖지 않는가. 그리고 일기장엔 이렇게 쓰리라. “어제 서쪽에서 졌던 해가 오늘은 새 빛을 비추며 동쪽에서 떠올랐다.”
김보경
수필가·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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