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로 시작되는 김수영의 ‘풀’은 한국 시인 100명이 가장 많이 추천한 한국 현대시의 대표작이다. 47세로 타계한 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이 시는 세상의 풍상과 그에 대응하는 끈질긴 삶의 태도를 노래하고 있다.
연초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새해에는 과연 경기가 풀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과연 ‘풀’처럼 ‘바람’보다 빨리 눕고 빨리 일어서 미래의 경기를 오늘 보여주는 지표는 없을까. 경제에 100%라는 것은 없지만 그와 가장 유사한 기능을 가진 것이 주식 시장이다. 증시는 통상 6개월에서 1년 먼저 경기의 흐름을 진단한다.
2005년 여름 미국 주택 시장이 펄펄 뜨겁게 달아오르던 시절 주택 건설회사 지수는 정점을 기록한 후 하락세로 돌아섰다. 당시에는 미국 부동산 호황이 거품이고 이것이 터질 때 경제는 극심한 불황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하는 사람은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을 때였다.
그러나 그 후 1년 후 주택 시장에서 점차 김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2007년에는 급락세로 돌아섰다. 2008년의 전 세계 금융위기의 근본원인이 부동산 거품과 이를 바탕으로 한 불량 모기지의 양산 때문이라는데 이견을 내는 사람은 이제 없다.
가주와 애리조나, 네바다, 플로리다 등 버블이 가장 심했던 지역은 주택 가격이 이미 최고치에서 40% 정도 떨어졌으며 앞으로 얼마나 떨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세계 경기가 회복되려면 금융 시장이 안정돼야 하고 금융 시장이 안정되려면 집값이 안정돼야 한다. 도대체 그 시기는 언제쯤일 것인가.
그 시기와 관련, 희망적인 조짐이 보이고 있다. 바로 주택 건설회사 지수다. 작년 말 최고치에서 80%이상 폭락했던 이 지수는 최근 바닥에서 30% 이상 오르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작년 말의 바닥이 버블이 본격적으로 부풀기 시작하던 2000년 수준에 거의 근접했던 점을 감안하면 거품은 이제 대체로 꺼졌다 봐도 무리는 없다. 모든 버블은 시작했던 수준까지 추락한 뒤 끝난다.
주택 지수가 다시 폭락하지 않고 상승세를 유지해 준다면 많은 전문가들 예상처럼 올 후반기 이후 주택 시장은 바닥을 친 후 회복세를 보이거나 최소한 안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되면 금융 시장도 점차 정상을 되찾을 것이며 이와 함께 경기도 차차 나아진다고 봐도 된다.
그러나 경기 전망이 어려운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돌발 변수가 터져 판을 깰지 아무도 자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올해 수천 억 달러 규모의 상업용 부동산 모기지가 재융자를 앞두고 있다. 이것이 순조롭게 이뤄진다면 별 문제 없지만 불황 때문에 공실률이 늘고 이를 이유로 은행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경우 이번에는 상업용 부동산 판 모기지 대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기억해야 할 것은 지난 수 년 간 미국경제의 호황은 주택 버블이라는 비정상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경제 현상의 덕이었으며 지금의 고통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따르는 아픔이라는 점이다. 이번 불황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분수에 맞는 검소한 삶의 미덕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렇게 헛된 것만은 아니다.
김수영은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고 글을 맺었다. 겸손하면서도 강한 생명력을 지닌 풀의 마음이 새해가 화두가 돼야 할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