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하나
이번 겨울 휴가를 한국에서 보냈다. 연이은 연말 출장 때문에 심신이 지쳐있던 우리는 지난 한해 열심히 살았던 상을 받는 기분으로 겨울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하루 전 여행 가방을 챙길 때였다. “여권은?” “응? 당신이 가지고 있잖아” “지난 번에 내가 분명히 당신 줬잖아”
해를 갈수록 놀라운 속도로 감퇴하는 서로의 기억력을 따지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분명히 어딘가에 얌전히 모셔져 있을 여권을 찾아 손바닥만 한 집을 우리는 몇 번씩 뒤집었다. 그래도 보이질 않고 새벽녘이 되자 우리는 애써 외면하던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다행히 연방빌딩에서 당일에 여권발급이 가능하다는 정보가 있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가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신청을 했지만 아무리 빨라도 오전 11시 전에는 힘들 것이라고 했다. 운이 좋아 11시에 여권을 받는다 해도 공항까지 가는데 30분은 걸릴 텐데 무슨 수로 12시에 이륙하는 비행기를 탄단 말인가. 게다가 연말이라 이후 일주일간 운행되는 비행기는 모두 만석이었다.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간절한 기도를 했다.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여권이 11시 정각에 발급이 되었고, 공항까지 최단시간에 도착을 했으며, 항공사에서는 탑승을 벌써 시작한 그 시간에 수속을 해주었다. 간신히 착석을 하고 숨을 돌리고 보니 그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선물 둘
친정이 좋긴 좋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두 돌 된 아들을 친정 부모님께 맡기고 내쳐 자기 시작했다. 그러다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웬걸 밤 12시가 다 되도록 외할아버지와 신나게 놀고 있는 게 아닌가. 아버지는 손자가 온다고 미리 준비해 놓으신 그림책을 읽어주시며 내가 자랄 때는 한번도 본적 없는 각종 동물 흉내까지 내시며 외손자와 놀아주고 계셨다.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언제나 크나큰 산이요 길이었다. 지식과 지혜가 축적된 실력 있는 사회생활의 선배로, 이 험한 세상에 대쪽 같은 청렴함으로, 기억 속의 아버지는 항상 고고한 분이셨다. 늘 엄하고 흐트러짐이 없으셨던 아버지. 이제 반백이 되신 아버지가 외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귀여워해주는 모습은 영락없는 할아버지의 그것이었다. 늘 바위 같았던 아버지의 무릎 위에, 이젠 당신보다 더 커져서 제각기 자기 일을 찾아 멀리 떠나버린 자식들 대신 당신의 손자가 앉아 있었다.
선물 셋
동생이 7년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평소 내색을 잘 안 하던 동생인데 이번에 보니 살이 부쩍 빠져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지금도 이별의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눈치였다.
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생은 현명한 선택을 했다.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기 위해 유학준비를 했다. 필요한 시험을 보고 지원서를 쓰느라 매일 분주하게 보냈다. 시험공부 중간중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들을 떨쳐내느라 더 독하게 공부를 했고 혼자 있는 시간에 청승을 떨까 봐 더 많은 스케줄을 만들어 전보다 더 열심히 살았다.
아직 지원한 학교에서 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결연함이 보인다. 또래의 친구들이 주어진 직장 생활에 만족하며 결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인생의 굴곡에서 도망치지 않고 굳건히 맞서 또 다른 장을 준비하는 그녀에게 보너스가 주어진 것 같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마를 정도로 슬퍼하고, 치열하게 준비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20대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 그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지니 조
힐리오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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