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뉴욕 한인회를 창립할 때 창립 멤버로 참가했던 것이 어제 같은데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컬럼비아 대학원에 다니던 당시 뉴욕지역 한인 유학생회 회장으로 한인회 창립에 참여했었다.
49년 전 한국에서는 3.15 대통령선거 부정사건으로 정의에 불타는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4.19 학생혁명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새로운 민주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뉴욕에는 한국 유학생들이 50-60명 정도 있었는데 부정선거 사건이 터지자 한국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한국에서 데모하다 희생된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남학생은 팔에 검은 완장을 두르고 여학생은 검은 리본을 머리에 꽂고 참여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한국의 학생들을 지지했다.
뉴욕 한인회는 1920년대와 30년대 유학을 하고 정착한 몇 사람이 한인 유학생회의 협조를 얻어 조직했다.
1965년 미국의 이민법 개정으로 한인 이민사회는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으며 뉴욕의 한인인구는 수십 배로 증가했다. 그 결과 뉴욕한인회는 좀 더 활성화되었으며 한인학생회는 각 대학별로 분화되었다.
미주 한인이민사를 쓸 때 반드시 기억해 둘 것은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이민자 103명이 1903년 1월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호놀룰루에 도착하기 이전에 미국에는 이미 한인 유학생과 인삼 장사와 기타 상인 등 100여명이 정착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05년 한인 숫자는 1,000명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의 한인사회 역사를 쓰는 학자들은 1882년 민영익 공사를 대표로 한미수교를 위해 한국정부 사절단 11명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 수행원 중 윤길준, 서광범 등 4-5명이 미국에 남아 유학생활을 시작했고, 구한말 즉 1903년 이전에 100여명의 상인, 주로 인삼판매상과 유학생이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다.(조종무 저 ‘아메리카 대륙의 한인 풍운아들’ (상,하권) 1987년 조선일보사 발행 참조).
미주 한인이민사를 좀 더 정확하게 쓰기 위해서는 1882년 한미수교로 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또 한인사회의 발전사를 영어로 출판해서 우리 후세들이 읽고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후세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무엇을 어떻게 미국사회에 공헌했는지 알고 싶으며 또 미국의 인종차별 대우를 어떻게 극복하고 이민생활에 성공했는지 그 지혜를 알고 싶어 한다.
한미수교 150주년인 2032년에는 한미외교 150년 역사는 물론 미국의 한인역사도 집필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미국사회에 널리 보급해 정확한 역사자료와 많은 인사들의 회고록을 남겨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따라서 미국의 한인 역사박물관 설립을 한번 꿈꿔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김일평
코네티컷 주립대 명예교수·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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