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후반 들어 미국은 물론 세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대통령을 들라면 로널드 레이건이 첫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그는 70년대 오랜 불황으로 주눅이 든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불러 넣으면서 감세와 예산 삭감, 규제 완화를 기조로 한 ‘작은 정부’를 들고 나와 미국 경제를 살려냈다.
그와 동시에 군비 증강을 통한 ‘힘의 외교’를 펼쳐 오랫동안 공산권과의 대결에서 수세에 놓여 있던 서구의 입장을 공세로 바꿔 놨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은 공산주의 자체 모순이 주원인이지만 레이건 외교도 이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30년대 대공황 때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과 60년대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을 거치면서 날로 커지기만 하던 연방 정부의 사이즈를 축소해 “최소한의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던 미 건국의 아버지들의 비전을 실현시킨 레이건의 업적은 공화당은 물론이고 일부 민주당원들의 찬사를 받아왔다.
민주당원이지만 세금을 거둬 펑펑 쓰는 리버럴이 아닌 ‘신 민주당원’을 자처한 빌 클린턴은 1996년 국정 연설에서 “큰 정부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해 그가 레이건의 그림자 속에 있음을 시인했다. 그 후 조지 W 부시 대까지 미국은 레이건이 짜놓은 큰 틀 안에서 움직였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레이건의 시대가 끝나 가는 듯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주 내놓은 예산안은 부유층에 대한 증세와 이산화탄소 배출 산업에 대한 규제, 교육 및 의료 분야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등 지난 30년간 통념으로 받아 들여 온 정부 역할에 근본적인 수술을 가하고 있다. 올 예산 적자폭만 1조 7,500억 달러, 내년 예산액은 무려 3조 5,000억 달러에 이른다. 그의 예산안에는 효과 없는 의료비 지출을 중단하고 부자 농부들에 대한 보조금 삭감 같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개혁적인 내용도 들어 있다.
오바마가 이런 과감한 정책을 펼 수 있게 된 것은 물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금융 위기 덕이다. 지금 미국인들은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정부가 무슨 일을 해도 좋다는 분위기다. ‘큰 정부’가 좋으냐 ‘작은 정부’가 좋으냐는 논쟁은 현재로서는 학교 연구실에서나 할 한가한 얘기처럼 들린다.
덩치만 크고 낭비 투성이며 비효율적인 거대한 연방 정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제 우리는 안다. 자유방임주의 아래 투기꾼이 판치면서 월가가 거대한 도박장으로 변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거품이 터져 은행과 기업들이 줄도산 하면 국민들이 기댈 곳은 정부밖에 없게 된다. 느슨해진 규제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지켜본 정가는 규제를 강화할 수밖에 없다.
은행과 월가 사이에 장벽을 쌓고 예금주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며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의 권한을 강화한 글래스 스티걸 법이 통과된 것은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이다. 대공황으로 실직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사회 보장 제도가 대폭 강화된 것도 이 때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호경기가 오래 계속되면 사람들은 왜 이런 규제가 생겨났는지를 잊어버린다. ‘신 경제’가 어떻고 하면서 영원한 호황이 계속될 것 같던 1999년 글래스 스티걸 법은 폐지됐다.
전례 없는 세계 주가의 동반 폭락과 신용 경색은 이번 불황이 몇 년에 한번 찾아오는 불경기가 아니라 한 세대가 한번 겪을까 말까 하는 공황 수준의 사건임을 말해준다. 불황이 장기화하면 할수록 정부 역할의 중요성과 오바마가 ‘역사적인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커진다.
먼 훗날 호경기와 함께 비대한 정부의 비효율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는 날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지만 당분간은 아닌 것 같다. 역사는 오바마를 ‘레이건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로 기록할 것인가.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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