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소설가 김영하가 UC어바인을 방문했다.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마련한 강의로 ‘나는 왜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라는 주제였다. 벌써 10여권의 소설집을 냈고 그 중에는 영어를 포함해 7개 국어로 번역되기도 한 중견작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흥분에 들떠 가까운 벗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젊고 자유로워 보였다. 얼마 전 한국 예술학교 교수직을 그만두고 시실리섬에서 한동안 머물며 기행집을 출간하고 밴쿠버를 거쳐 이젠 뉴욕으로 떠난다고 했다. 영어자막으로 준비된 화면이 학생들의 이해를 도와주었고 동시에 작가의 생생한 모국어 강의는 모처럼 문학에 대한 나의 목마름을 씻어줬다.
그는 물론 영어도 능숙했다. 함께 간 나의 영어 선생은 비무장지대를 직접 경험했던 작가를 만난 것이 경이로운지 자신의 할머니가 자유롭게 서로 넘나들던 시절의 멕시코 국경을 이야기했다. 실로 언어와 문화의 벽을 넘어 보편적인 감동을 나눌 수 있게 해준 젊은 작가에게 부러움을 넘어 고마움이 느껴졌다.
유년에 대한 그의 첫 이야기는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비무장 지대의 관사에 살았던 그는 열 살이 되던 해 연탄개스에 중독되어 고압산소통에 들어가고 말았다. 열살 이전의 모든 유년의 기억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그는 작가가 되었고 자신을 소설가로 만든 바로 그것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부재하다는 것에 있다고 고백했다. 흥미로운 아이러니였다.
그는 사라진 기억을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에다 비유했는데 그래서인지 유난히 작가는 사라진 것들, 잊혀져간 사람들의 흔적에 집착했고 그래서 나온 작품이 ‘검은 꽃’이었다. 1905년 제물포를 떠나 일포드호에 오른 조선인 1,033명은 지구 반대편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팔려갔고 얼마 후, 역사의 블랙홀 속으로 증발해 버린 그들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처음으로 이민자로서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소설가 김영하의 ‘구멍’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난 루이스 쌔커의 ‘구멍’(Holes)을 떠올렸다.
유명한 야구선수의 신발을 훔쳤다는 누명을 쓴 주인공은 텍사스의 버려진 땅에 세워진 ‘초록호수 캠프 소년원’에 갇혀 이유도 모른 채 자신의 구덩이를 파게 된다. 그것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던 불운 때문이었다. 지옥의 옆 동네인 소년원을 배경으로 스탠리를 포함한 세 가지 이야기가 교묘하게 얽힌 이 성장소설은 행운과 불운, 선과 악, 희극과 비극, 자유와 운명 사이에서 뒤섞이는 반전이 유쾌하며 따뜻하다. 결국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스탠리가 뙤약볕 아래 힘겹게 팠던 구멍은 올바른 시간, 올바른 장소에 있었던 행운의 장소로 변모하게 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삶 속에는 이렇듯 숱한 구멍들이 존재하는 지도 모르겠다. 때론 까마득한 기억의 저편, 망각의 바다이기도 하고 때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미지의 세계로 넘어가는 호기심 가득한 통로이기도 한, 그리고 때론 스탠리가 파야했던 구덩이처럼 행복한 사람은 겸손하게 되고 불행한 사람은 희망을 품게 만드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 곳이기도 한 구멍은 우리가 눈치 채든 못하든 우리 곁에 있다.
1930년대 중반, 거실 카펫에 뚫린 작은 구멍을 바라보던 옥스포드대 교수 톨킨은 이렇게 썼다. <땅 속 어느 굴에 한 호빗이 살고 있었다.> 20세기 새로운 소설 장르인 팬터지 문학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미경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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