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지상에 출현한 후 수 백 만년 동안 인간은 주로 사냥을 하거나 산나물을 뜯어먹고 연명했다. 이 단계에서는 그날그날 배를 채우기에도 바빴기 때문에 교환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1만여 년 전 농업을 시작하면서 잉여 농산물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노동의 전문화가 이뤄지면서 다양한 물건이 만들어지고 이를 교환할 필요가 발생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돈이다. 칼부터 조개껍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이 돈으로 사용됐지만 전 세계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진짜 돈으로 대접받고 있는 것은 금과 은, 그 중에서도 금이다.
귀하고 아름다우며 변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황금은 ‘지상의 태양’이라는 상징성까지 겹쳐 어떤 물건보다 보편적인 교환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이집트 시대에 황금 1온스는 좋은 옷 한 벌을 살 수 있는 가치를 지녔다. 지금도 황금 1온스(현 시세로 약 900여 달러)면 좋은 양복 한 벌은 살 수 있다. 황금의 가치 보존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준다.
반면 금이 아닌 정부 발행 화폐의 가치는 예외 없이 시간이 갈수록 하락한다. 아무리 큰 제국도 마찬가지다. 로마 금화와 은화의 가치는 재정 적자가 심해지면서 순도가 계속 떨어져 결국은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 로마 멸망에 일조한다.
지폐는 더 쉽게 가치를 잃는다. 한 때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는 세계 최초의 지폐를 발행했지만 말년에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이를 남발, 결국 휴지가 되면서 나라가 망했다.
휴지가 된 지폐 이야기는 옛날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제1차 대전 후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 등으로 인한 재정 적자를 마르크화를 찍어내 해결하려다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리어카로 마르크화를 실어 날라야 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1980년대 브라질 등 라틴 아메리카에서 몇 년 마다 0을 몇 자리 씩 떼어 새 화폐를 만들어내는 일을 되풀이했다.
대영제국이 세계를 지배하던 19세기 영국 화폐인 ‘파운드 스털링’은 신용 그 자체였다. ‘스털링’이라는 말 자체가 순은을 뜻하는 것처럼 대영제국의 발길이 닿는 곳이면 세계 어디에서나 황금과 똑같은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제1차 대전 후 국가 채무가 급증하고 대공황의 충격으로 금본위제를 폐기하면서 파운드화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영국 전성기 때 1파운드면 4~5달러를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1달러 40센트 선으로 추락했다.
과거 영국이 걷던 길을 비슷하게 밟는 나라가 있다. 바로 미국이다. 제2차 대전의 승리로 사실상 패권을 쥐게 된 미국의 달러화는 지금까지 세계의 기축 통화 노릇을 해왔다. 세상 사람들이 달러를 기축 통화로 인정해 주는 한 미국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필요한 만큼 무한히 찍어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재작년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 때 달러는 기축 통화로서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전 세계 투자가들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긴 달러를 사들이는 통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발 금융 위기의 본산인 미국 화폐의 가치가 폭락하기는커녕 오히려 뛰어오른 것이다.
그러나 기축 통화 소유국은 문제가 생겼을 때 어려운 수술보다는 쉽게 화폐를 찍어 이를 해결하려 하며 결국 이는 나라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지금 미국 재정 적자는 1조 7,000억달러에 이르며 앞으로 추가 부양책이 나올 경우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천문학적인 빚이 늘어날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어느 순간 미국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그렇게 되면 달러도 과거 파운드와 마르크화가 밟았던 길을 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파운드화도 대공황 후 반짝 올랐으나 결국 다시 추락하고 말았다.
한 때 영국의 채권국이자 세계의 공장이었던 미국은 지금 중국에게 채권국과 세계의 공장 자리를 내주고 있다. 그 와중에 중국 위안화는 꾸준히 오르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마는 것인가.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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