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금융인 정원훈 남기고 싶은 이야기 - <8> 한미은행
발기인들간 감정다툼 문 박차고 나가기도
담당 변호사·CPA 선정 과정도 순탄치 못해
브라운 주지사·브래들리 시장에 기부까지
■발기인
“좋소. 그럼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같이 하는 은행설립 인가를 받는 일로부터 손을 뗄 것을…” B씨는 상기한 얼굴로 그러나 단호하게 그의 결심을 토했다.
이른 아침 윌셔가와 버몬트에 가까운 한 빌딩 아래층 커피샵에서 있었던 장면이다. 이슈가 무엇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다만 새 은행 발기인의 한 사람인 B씨가 뭔가를 몹시 언짢게 여긴 나머지 이런 최종선언을 한 것이다.
어느 봄날 한 자리에 모였던 우리들, 가칭 설립 발기인들은 다들 어안이 벙벙해서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어색한 광경이 빚어진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머리를 맞대고 지내는 과정에서 뭐랄까 일종의 자체 혐오증에 걸린 것이다.
‘은행은 무슨 놈의 은행 이렇게 감정까지 상해야 한다면 집어치우지’ 하는 느낌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앞장을 섰다. “B사장, 좀 진정하세요. 이만큼 애써 해왔었는데 중도에서 그만 두시다니, 처음부터 힘든 일이 있더라도 다 같이 끝까지 밀고 나가자고 했던 것 아니요? 은행 설립이라는 대업을 이루는데 오늘 같은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까?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아주세요. 자, 다음 안건에 들어갑시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서 그를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은행 설립을 위해 20여차례 모임을 갖는 동안 이러한 탈퇴극이 네 번인가 연출되었다. 은행 하나 만든다고 너무 열중하고 격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협동이니 합작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의자를 박차고 문밖으로 나가버리겠다는 이들 중에 실은 나 자신도 끼어 있었으니 자신도 못 믿을 맹랑한 일이다. 새로 설립될 은행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은행이 서면 가장 큰 덕을 볼 사람은 누구인가. 이익을 내건 못 내건 나는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을 뭐 남들이 좀 알뜰치 못하다고 이따위 은행 필요 없다며 문을 박차고 나가려 하다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다른 양반들이 모두 안 하겠다 해도 나만은 그럴 수 없다고 설득해야 할 입장이 아닌가. 그래야 표리 없는 인간이란 말이나마 듣지 않을까.
■은행설립의 견인차 : K 사장
Schumpeter라는 경제학자는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기업이란 남다른 이들이 해내는 일이라고 했다. 머리도 똑똑하지만 막무가내인 괴짜, 그런 따위의 친구야 말로 이 일을 해낸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deviant라 했다. 이런 논리는 은행 설립에도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은행도 실은 한 사람의 괴짜가 있어서 밀고 끌고 해쳐나가면서 문을 열게 되는 것이다.
한미은행의 경우 그 역할을 맡은 자가 무역업 종사자 K사장이었다. 그는 한 두어 번 초기 설립 준비회합 때 전문가 두 사람을 대동했었다. CPA와 변호사가 그들이다. 은행을 새로 만들자면 이런 전문가들의 원조가 필요한 것 같아서 데리고 온 것이다. 비용은 회사에서 부담할 테니 걱정 말라고 부언도 했다.
■변호사와 CPA
가주외환은행 당시 은행국장을 지냈던 Pearson씨가 그 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부탁을 했더니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는 Earnest Gould이란 전문 변호사로 하여금 우리 은행을 담당하도록 했다. Earnest는 유능한 장년의 은행전문 변호사로 일을 신속 정확하게 처리해 주며 우리의 은행 설립에 관한 일을 선도해 주었다. 은행국장 시절, 훌륭한 업적을 올렸던 만큼 Pearson씨에 대한 은행국 실무 담당자들과의 우의와 신망도 짐짓 두터워 보였다. 그 덕으로 우리 신청서도 남 못지않은 대우를 받을 것으로 믿어진다. Earnest를 돕는 경제조사 담당자 Bert Reug의 업적도 효과적이었다. CPA는 Kim & Lee의 김성철씨였다. 설립준비 기간에는 별반 도움 받을 일이 없었지만 설립 후에 계속 은행의 회계감사를 부탁했다. 한국 외환은행 때의 경험으로 보아 나는 소위 Big 9의 서비스가 그리 믿음직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
연수생을 보내온 것은 은행의 운영이 잘되고 있었기에 신뢰가 먼저 앞섰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은행을 실습장으로 본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개운치 않았다. 김성철 사장이 우리 감사를 맡아주면 그 회사의 중견들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줄 것이다. 어찌 Big 9의 연수생에 비할 것인가. Kim & Lee는 한미의 성장과 더불어 은행의 훌륭한 회계감사역을 해주었다. 그런 좋은 실적 덕분에 그 회사는 그 후 다른 한국계 은행의 회계감사를 4~5군데나 맡기도 했다.
■굿거리
K사장은 먼저 본대로 자기 사람의 무보수 제공, 기타 편의제공 등으로 은행 설립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반면 고집스러운 일면도 없지 않았다. 한국식 사고방식에의 집착이라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은행의 설립 인가는 누구 이름으로 나오느냐 그것은 가주에서는 주지사다.
정치가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일종의 의무가 아니겠느냐 하는 사고방식이다. 당시의 주지사는 Jerry Brown Jr.(그의 선친 Brown Sr.도 주지사로 명성이 높았다)로 그의 보좌관 중에는 한국인(Sam Kim)도 있어서 그를 통해 우리 건의 선처를 부탁하고 있던 터였다.
LA 시장은 Tom Bradly로 이 분들과는 일부 교포 인사들 중에도 친분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었고 교포사회를 잘 살펴주고 있는 너그러운 보호자(protector)들이었다. 이들의 활동을 돕기 위한 (정치)자금을 제공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이 발기인 모임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우리의 리더 격인 K사장이 이 기부랄까 정치자금 제공에 대해 적극적으로 앞장을 서는 상황이 빚어졌다.
나는 이런 발상에는 근본적으로 반대였다. 그것은 주로 가주외환은행 때의 경험에 기초를 둔 것이다. 주은행국은 주지사 밑에 있지만 거의 독립된 기관이다. 그에 더하여 미국까지 와서 영향력을 사보자고 뒷거래를 일삼느냐 하는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미국에서는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아도 순리에 따라 정당의 뇌물을 바치는 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고 헛되이 ‘굿’이나 치르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실제 우리 모임에서 나는 ‘미국까지 와서 하필 굿이냐’하고 반론을 폈다. 그러나 K사장의 뜻은 확고했다. 여러분들이 안 낸다면 나 혼자라도 마련해서 내겠노라 하는 것이다. 실제 상당 부분을 그가 부담하고 다른 발기인들도 얼마씩 부담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적게 낸 나도 두세 번 내는 동안에 1만달러 정도 분담한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분들은 그보다도 많은 출연을 했을 것이다.
우리 발기인단은 브라운 주지사와 브래들리 시장을 한두 번씩 초대했다. 두 분 다 우리의 기부에 대해 격의 없는 사의를 표하며 만족해했다. 그런 천진난만한 그들의 모습을 접하니 ‘굿’ 효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던가 생각도 해봤다. ‘굿’은 good인가? 여하간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그를 생각하게 된다. 그 한 사람의 고집과 끈기가 없었더라면 은행 설립은 이루어지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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