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금융인 정원훈 남기고 싶은 이야기 - 한미은행
한미은행 창립 후 조지 최(왼쪽) 한미은행 초대이사장과 함께한 필자.
타운중심서 벗어난 올림픽-크렌셔에 점포 매입
주은행국 이사진 변경요구 벌집 쑤셔놓은듯
자본금 550만달러로 개업 단기간내 성장가도에
▲영업소
은행 설립 허가도 거의 가시권에 들었을 무렵 발기인단은 점포 후보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올림픽가 서쪽 크렌셔에 가까운 곳으로 중의가 기울었다. 코리아타운이라 할 수 있는 버몬트와 웨스턴 구간부터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다. 더 마땅한 곳이 없어 이곳을 택하게 된 것이다.
매매계약 체결까지는 자질구레한 문제들이 있어 보였다. 다행히 발기인단 중에 전문 부동산 브로커가 있었다. 국제 부동산회사의 최 회장으로 그에게 일임했더니 별 탈 없이 계약합의를 보았다. 이 일을 의결하는 모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좌상인 K사장이 입을 열었다. “최 사장,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를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좀 엉뚱하지만 남의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유대인들과 관련을 맺고 일 해오면서 이번 건과 흡사한 예를 두세 번 봤습니다. 그들은 이런 경우에는 구매자 측의 중계료는 전혀 받지 않습니다. 최 회장의 반응이 일품이었다. “뭐 그리 긴 말씀을 하시오. 나는 원래 커미션은 생각도 안 했는데.” 최 회장은 내가 행장으로 있는 동안 그리고 후에도 몇 해 동안 오래도록 이사장직을 맡아주었다.
▲한미 지키기
하루는 서울서 전화가 왔다. 그 곳에서 ‘한미은행’을 설립중이라며 전직 재무장관 M.K.씨가 내게 부탁이 있단다. 한미의 이름을 그에게 양보하라는 것이다. Bank of America와 합작으로 신설하는 시중은행이다. 세계적인 점포망도 가질 예정인데 명칭으론 ‘한미-Hanmi’가 내외간 가장 적합한 것으로 채택이 돼 있는 상태다. 암만해도 가주의 지방은행인 귀행이 다른 이름으로 바꿔줘야겠다 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에 자연스레 답이 나왔다. 본국의 굵직한 양반들이 하는 말이니 웬만하면 받아들이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2년간이나 그 이름을 앞세우고 애써왔던 Hanmi다. 또 그것은 관에 등록한 명칭이기도 하다. 나는 두 번째에 역점을 두며 서울의 청을 거절했다. 이 결과 서울의 ‘한미은행’은 영문으로 ‘KoRam Bank’가 됐다.
▲청천벽력
은행설립 준비에 전력투구한 지 2년이 지났다. 모든 절차를 다 밟았고, 요구하는 모든 사항을 수정하고 첨가하고 가진 절차를 하나하나 충족했다.
믿지는 않았지만 위에서 본 것과 같은 ‘굿’까지 펼쳤었다. 그래도 인가는 나오지 않았다.
1981년 봄 나는 주은행국을 찾았다. 낯익은 담당 감독원장보에게 “인가를 받으러 왔는데” 하고 농담을 걸었더니 그는 “마침 잘 왔어” 하면서 나를 부원장실로 끌고 갔다. 그러더니 뜻밖의 통고를 해댄다. 발기인단 중 4명을 제명한다는 것이다. 4명은 다른 사람 아닌 K사장과 그를 따라온 3명이었다. “어떻게 우리의 주도자인 K사장을 탈락시킨단 말이요, 그 이유는 무엇이오?” 내가 항의조로 대들었다.
감독원장보는 나를 달래듯이 “President Chung! Calm down.” 하면서 은행국은 “사유를 밝히지 않는다. 다만 결정만 통고한다”라고 잘라 말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이제는 은행설립을 할 수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나를 당황케 했다. 그래도 힘을 내서 반문한다. “그들 없이도 은행설립 인가는 해주는 거지?” “아니다. 그들을 빼면, 이사진이 너무 약해진다. 대신 보충을 해야 한다.” 나는 순간 그동안 이사후보를 만나 보던 면면을 머리에 그려보았다.
“결원된 이들을 다 보충해야 하느냐?” 했더니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얼버무렸다. 나는 답하는 겸 말했다. “최선을 다하겠다.” 부원장보는 그렇게 해보라 하는 것이었다.
발기인 회의를 소집하고 이 일을 알렸더니 우리 모임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았다. K사장은 “행장이 어떻게 했기에 그런 결과를 가져왔소?” 하고 나를 나무랐다. 그러나 내가 잘못해서 나온 상황이 아님이 너무도 명백했다. 은행국이 K사장과 그의 친지 3명을 이사후보 명단에서 제명한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그 후 오랫동안 나의 미해결의 의문으로 남았다. 결국 아직도 나는 그 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후 다른 사례들에 비춰볼 때 주식 지분에 관한 독점그룹 형성 방지조치가 아니었을까 추측이 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런 판단을 내렸을까.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발기인 보충
이런 상황에서 바빠진 건 내 자신이었다. 어떻게든 잃어버린 발기 인사를 보충해야 하는 것이다. 전에 이야기했던 이사 후보자 중 할 만한 분을 찾아가 유세를 폈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세 사람에게서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곧바로 은행국에 3명을 보충했다고 연락했더니 그만하면 괜찮을 거라며 쉽게 받아주었다.
결국 1981년 10월에 주인가가 나왔다. 그런데 지금도 가끔 길을 걷다가 발을 멈추고 혀를 차게 되는 일이 있다. 어떻게 온 정성을 다하고 부담을 마다하고 마련해 주었던 K사장을 개업 일보 전에서 잃어버렸을까. 이유 근거는 여하간 뭔가 잘못됐던 게 아닐까 하는 애석한 느낌이다. 2003년 초 한미은행 20주년 기념 회합이 있었다. 다수의 관계자 내빈이 넓은 회장을 꽉 메웠다. 그 중 나는 한 사람의 주요 공헌자를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아쉬움만 남았다.
▲초기 운영실적
한미은행은 1982년 12월15일 자본금 550만달러로 문을 열었다. 이 가주 현지은행은 미국에서 뿐 아니라 세계에서 처음으로 배달민족 교포들만의 자금으로 설립된 은행이다. 설립 초부터 순탄하고 착실한 성장을 이룩했다. 성과 성적도 우수해서 3년째부터는 배당금을 주기 시작, 4차 결산에서는 25%의 배당을 줄 수 있었다.
개업 후 이렇게 단시일 내에 고율의 배당 이익을 내는 경우는 별반 유례가 없는 것으로 우리들 경영담당자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매년 우수은행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나는 잠시도 감사의 마음을 잊지 못했다. 그 하나는 미국이란 나라요, 또 하나는 우리 교포라는 은행고객들이다. 미국은 세계를 통틀어 외국인 거주자에게도 은행이라는 중요한 사업의 경영을 허가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이 나라의 개방적인 제도와 그에 따른 번영이라는 배경이 없었더라면 갓 이민 온 외국인들이 은행업을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교포들의 열성도 자극했다. 모국의 은행이라고 허름하고 가깝지도 않은 영업소를 찾아주었다. 이것을 어떻게 풀이해야 옳을까. 애족심인가. 또는 배달민족이 대대로 이어받은 자기 집결력이라 할 것인가. 은행 경영을 맡은 우리로서는 뜨거운 감투가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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