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계는 흔히 ‘혈맹 관계’로 불린다. 6.25 때 같이 피를 흘리며 북한과 싸운 사이라는 뜻이지만 6.25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지난 수십 년 간 양국의 사이는 순탄하기보다는 껄끄러운 일이 많았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시절부터 워싱턴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온 이승만은 미군정 시절 내내 미국과 충돌했다. 전쟁 중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한 결정도 그런 와중에서 나온 것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와 미국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박정희 일생일대 가장 많은 담배를 피며 내렸다는 월남 참전 결정이전까지 박정희는 늘 미국을 업은 역 쿠데타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한동안 그럭저럭 유지되던 양국 관계는 1976년 지미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979년 6월 악천후 탓으로 공항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려 카터를 만난 박정희는 왜 철군이 부당한가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카터는 한국의 열악한 인권 상황과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거론했다. 결국 화가 머리끝까지 난 카터는 “이 자가 입을 닥치지 않으면 내가 자리를 뜨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일어섰다. 그 후 넉 달 만에 박정희는 암살됐다.
역시 사실상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은 미국의 추인이 필요했다. 1981년 레이건이 취임하자마자 워싱턴으로 달려가 정상 회담을 하고 싶어했다. 그 때 워싱턴은 김대중의 생명을 교환 조건으로 내걸었다. 사형이 확정돼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김대중이 목숨을 건진 것은 양국 정상회담 덕이다.
DJ와 조지 W. 부시 관계는 박정희-카터 이후 최악이었다. 2000년 김정일과의 정상 회담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DJ는 부시 취임 직후인 2001년 3월 워싱턴으로 달려와 ‘햇볕 정책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김정일을 치켜세우고 자신을 위에서 가르치려는듯한 태도에 마음이 상한 부시는 DJ를 “이 사람”이라고 칭해 많은 한국인들의 분노를 샀다. 최근 DJ는 당시 부시가 자신을 “모욕 줬다”고 말해 그 때의 분노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그 뒤를 이은 노무현-부시 관계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반미면 어떻습니까”를 외치던 노무현은 미국에 와서는 “미국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쯤 북한 강제노동 수용소에 가 있었을 것”이라고 환심을 사기 위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유시민에 따르면 이는 “대북 정책과 관련, 미국의 협조를 구하려면 부시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해야 한다”는 당시 보좌관들의 조언을 따른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 버시바우 전 주한 미 대사는 “2005년 노무현-부시 정상 회담은 북한 제재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는 등 사상 최악의 정상 회담이었다”고 털어놓은바 있다.
2008년 4월 역시 취임 직후 워싱턴으로 달려간 이명박-부시 회담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자유 무역협정(FTA)과 대북 정책에 관해 코드가 맞는 두 사람은 시종 화기애애했으며 이명박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 캠프 데이빗에서 골프도 치는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 돌아온 이 대통령은 전임 정부가 약속한 쇠고기 수입을 허용했다 “보건 주권을 캠프 데이빗에 팔아먹었다”는 비난과 함께 석 달에 걸친 촛불 시위에 시달려야 했다. 환대를 받고 뭔가를 내주고 돌아오면 대선 패배의 설욕을 노리고 있는 좌파들이 이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정치적 감각 부족을 보여준다.
이명박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간의 정상 회담이 16일 워싱턴에서 열린다. 이번 주요 의제는 한미 FTA와 북한 문제다. 지난 수년간 예를 보면 성과는 그만 두고 역풍만 맞지 않아도 성공 소리를 들을 판이다. 이 대통령은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지난번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바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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