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까마득한 옛날이야기 같지만 한 때 LA 한인사회에서 ‘은행 이사’ 명함은 선망의 대상 그 자체였던 시절이 있었다. 장사를 해 돈은 벌었지만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은행 이사라는 직함은 ‘미국에 와서 나도 성공했소’라고 뽐낼 수 있는 보증 수표 역할을 했다.
사회적 지위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은행 이사는 더할 나위 없는 가치가 있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하이텍 붐, 부동산 붐에 한국에서 몰려든 여유 자금까지 겹쳐 한인 은행들은 ‘문만 열고 있으면 돈이 벌리는’ 시대를 맞았다. 이와 함께 은행 주식도 폭등, 이사 가운데 백만장자는 부지기수고 천만장자도 여럿 나오는 상황이 벌어졌다.
10여년전 서너 개에 불과하던 한인 은행수도 가속적으로 늘기 시작, 군소 은행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다. 너도나도 투자자금을 들고 몰려드는 통에 돈 걱정은 할 필요도 없었다. 당시 한인 은행 난립은 하이텍 버블 마지막 단계와 닮아 있다며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이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이 때 생겨난 군소 은행 중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미래은행이다. 2002년 7월 문을 연 이 은행은 후발 주자로 기존 은행들을 따라잡기 위해 공격적인 경영을 폈다. 1년여만에 손익 분기점을 돌파하고 작년에는 5개 지점망까지 갖췄다.
그러나 이같은 성장에도 불구하고 초창기부터 이 은행의 건정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던 것도 사실이다. 이사진에 은행 업무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이 결여돼 있었을 뿐 아니라 이사간의 반목과 대립이 그치지 않았다. 이사들이 시시콜콜한 은행 업무에까지 간여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고 이사들 눈치를 보며 대출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부동산 호황에 가려져 있던 이런 문제점들이 2007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해 부실 대출이 수 백% 증가하면서 자본이 급속하게 잠식됐다. 이로 인해 은행 감독국의 증자 명령을 받게 됐고 이를 이행하지 못해 결국 지난 주 문을 닫게 된 것이다.
심각한 것은 이것이 ‘미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있다. 정도의 차는 있지만 대다수 한인 은행이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경제가 더 악화될 경우 제2, 제3의 ‘미래’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일부 경제 지표의 호전에도 불구하고 한인 은행 주력 대출 분야인 상업용 부동산 시장은 침체일로를 겪고 있다.
많은 은행들이 증자에 고심하고 있지만 이런 경기에서 현지 자금 마련은 지극히 어렵다. 한줄기 희망이 한국에서 투자가를 구해 오는 것인데 은행마다 한국에 손 벌리러 가는 통에 이곳 사정이 잘 알려져 투자 유치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한인 은행계에는 내년을 걱정하며 잠 못 이루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같아서는 이사 명함은 영예가 아니라 수모의 상징이다.
그러나 모든 은행이 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튼튼한 은행에게는 요즘 같은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윌셔 은행이다. 윌셔는 이번에 ‘미래’를 떠안으면서 명실상부한 LA 한인 최고 은행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규모도 커지고 감독국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널리 공표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한인 예금주나 대출을 받은 사람 입장에서도 은행이 완전 청산되거나 미국 은행에 넘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불편을 덜 겪게 됐다.
‘미래’와 관련 두 가지가 생각난다. 하나는 ‘소문난 잔치’에는 먹을 것이 없다는 점이다. 손쉽게 돈을 벌어보겠다고 사람들이 몰려들 때는 대체로 너무 늦었다. 또 하나는 토끼는 거북이를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호경기 때 잘 뛰는 것보다 불경기를 버텨내는 것이 몇 배나 더 중요하다. 옛 사람들은 후대를 위해 좋은 교훈을 남겨놓았지만 사람들은 이를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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