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엄마가 아기의 손을 잡고 가게로 들어선다. 자꾸만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보더니 인사를 건넨다.
“아주 오래 전부터 계신 분 맞지요? 어릴 적 동아서적 단골이랍니다. 여전히 이렇게 계시니 반갑네요. 지금도 계실까 궁금해 하며 왔어요. 아이 책 사려구요”
인사성 밝은 어린 손님들은 자라면서 참새가 방앗간을 찾는 것처럼 자주 와서 인사를 하며 책을 사가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새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아이 책을 고른다.
곰돌이 그림책, 딕부루너 그림책은 제가 어릴 때 엄마가 사준 것들인데 아직도 있네요. 아아, 우리 아이에게도 사줘야지 하면서 젊은 새댁들은 상기된 얼굴로 옛 추억에 잠기곤 한다.
비즈니스를 오래하긴 했나보다. 대를 이은 단골손님이 점점 늘어간다.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비즈니스를 처음 시작하던 1980년대 말, 한글을 접할 수 있던 미디어는 오직 일간신문뿐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글 매체가 책과 신문뿐이었던 그 미디어의 원시시대에 한국 책 독서 인구는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단골손님들은 매주 고정적으로 책을 사러왔다. 대부분 스몰비즈니스 업주였다.
고학력의 한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익숙하지도 않은 업종인 리커, 마켓, 햄버거 샵, 세탁소 등을 꾸려나가야 했다. 고생을 각오하고 온 이민일지라도 생소한 환경과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여갔다. 많은 스몰비즈니스 업주들은 가게에서 일하다 틈이 나면 다양한 주제의 한국 책을 보면서 지적인 갈증과 타향살이의 향수를 달랬다. 책은 이민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때는 책방이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부모들은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와 책방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주말이면 우리 아이들이 동아서적 가자고 졸라대서 이렇게 자주 온답니다라는 말을 여러 부모들로부터 들었다. 말과는 달리 부모들이 더 한국 책 고르기에 바쁘고 넋을 잃고 책을 보곤 했다. 주말은 무척 북적여서 더불어 함께 사는 맛이 나는 그야말로 장터였다.
아이들은 한국 책, 미국학습서, 만화책, 어린이 잡지 등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엄마 아빠랑 책을 고르고 한국제품의 연필, 필통, 크레용, 일기장, 음반 등을 사면서 한국의 정서를 접했다. 지금과는 달리 외곽지역에는 한국서점이 없었고 코리아타운에도 서점이 두 세 군데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등장하기도 전이었다.
한류의 물꼬는 이민가정의 자녀들이 트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한인자녀들이 한국의 전통과 한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국책, 한국 TV드라마, 한국 가수들의 음반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가까운 미국친구들에게 소개한 것이 한류의 출발점일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지금과 비교하면 책이 무섭게 팔려나가던 그런 시절이었다. 비즈니스를 시작하여 호황도 잠시 반짝 이었다. 곧 이어 한국 래디오, TV 방송,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점점 독자가 줄어들고 책의 선별도 몹시 까다로워졌다. 특히 이제는 책 대신 인터넷의 검색 사이트가 다방면의 실용지식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곧이어 불어 닥칠 전자책(e-Book)의 대중화는 오프라인 서점의 쇠퇴를 가속화시킬 거라는 예감이다.
그래도 여전히 종이책을 찾는 독자들은 있을 것이다. 돈키호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신곡, 파우스트 등 고전명작들을 다시 읽을 때마다 나는 새 책으로 읽는다. 날이 갈수록 기술이 발달하여 인쇄도 선명하고 종이도 깨끗하고 편집 디자인도 멋져서 손에 쥐고 읽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제목의 책이 누렇게 변색된 책부터 새 것처럼 보이는 책까지 몇 권씩 집 서가에 꽂혀있다.
책은 종이 책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는 소수의 종이 책 매니아들 그리고 전자책 단말기를 다룰 줄 모르는 아기들만 종이책을 사는 시대가 머지않아 올 것 같다. 그래도 수천년 동안 종이책을 펼치고 읽어 온 그 독서의 전통을 쉽게 버리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다.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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