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건주 세일럼시 근교 동생 집을 나올 때만 해도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캘리포니아주와의 경계선 가까운 산악지역에 이르자 탐스런 눈송이로 변했다. 나는 속으로 ‘아, 이제 곧 마운트샤스타 빌리지에 들어가서 느긋이 맛있는 점심을 먹고 눈이 계속 더 내리면 아예 호텔을 정하고 눈놀이나 실컷 하면 되겠구나’ 하고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정작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마운트샤스타 빌리지에 도착하자 펑펑 내리는 눈발을 보며, 여기서 개솔린 탱크를 채운 다음에 한시 바삐 눈 내리는 산악지대를 빠져나가야겠네 하고 중얼대더니 얼른 주유를 마치고 페달을 밟아대었다.

오후 세시반이 되어서야 겨우 아름다운 설경 모두를 뒤로하고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에 이름 없는 어느 작은 마을의 ‘바 앤드 그릴’이라고 써놓은 콘크리트 빌딩으로 들어가 멋없는 테이블에 앉아 ‘그릴’ 보다는 ‘바’가 분명한 한 페이지짜리 썰렁한 메뉴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남편이 한마디 했다. 아니 왜 그리 얼굴이 창백해? 배고프고 피곤해서 라고 답하기도 너무 지쳐서 멀끔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더니, 어, 미안해. 그러고 보니 배고픈 거 못 참는 당신 사정을 전혀 고려치 않았구먼. 나는 눈에 묻혀 오늘밤 버클리에 도착 못할까 봐…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음식이 들어가 말할 기운이 생기자 나는 그때서야 지금쯤 마운트샤스타에서 신나게 눈싸움을 하고 있어야 할 나의 몽상을 털어놓았다. 그는 순간 약간 당황하며, 어, 진작 얘기하지 했다.

저녁 여덟시가 다 되어 버클리에 도착하자 남편은 친구 집으로 직행할 태세였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나는 이번에는 완강한 어조로 이 시간에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달라기도 뭐하고 그 집에 밥이 있다는 보장도 없으니 간단히 저녁을 먹고 가자고 말했다. 그는 나의 말을 따라주었다.

그날 밤 버클리의 친구 집 침대에 누워 언어와 인종의 차이를 떠나서라도 신체적, 기질적으로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를 때가 많은 우리 부부가 만나 잉꼬부부라는 소리를 들으며 잘 살고 있는 것이 묘하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했었다. 함께 사는 순간순간 인간은 수없는 양보와 절충을 계속해 가며 그 안에서 친구나 부부관계가 돈독해져 간다. 이는 행복한 공존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

요즈음 미국과 한국에서 확고한 당파로 갈라져 으르렁대는 정치인들을 보면 우리 쪽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상대방에 도움 될 일은 무조건 결사반대라는 태도다. 국민들은 이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정치인은 다 그렇지 하고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양상이다.

공화당이 정권을 잡아도, 민주당이 정권을 잡아도 미국이 폭삭 망하거나 특출 나게 잘 나가지 않음을 미국인들은 안다. 진보가 정권을 잡아도, 보수가 정권을 잡아도 한국이 거덜 나거나 갑자기 일등국이 되지 않음을 한국인들은 안다. 그렇지만 정치인들이 최종 목표를 정권 탈취와 유지에 두기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다 행복하고 평화롭게, 세계와 공존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두고 정치를 펼친다면 누가 정권을 잡던 국민들의 삶의 질은 확연히 나아질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 한 지붕 밑에 사는 원리나 국가와 사회가 움직여가는 원리는 결국 그리 다르지 않다. 같은 목표를 향해 끊임없는 양보와 절충을 기반으로 공존하는 정치적 풍토가 인류에 뿌리 내리도록 정치인들에 압력을 가하는 일은 우리들 일반시민의 몫이다.

김유경 / Whole Wide World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