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동네는 동화그림 속 동네처럼 화려하고 예쁘다. 100년 넘은 집들이라 마당이 작아 꽃밭이 돋보이고, 몇십년 동안 한 집에 산 이웃들이 많아 오래전 심은 꽃들이 만개해 봄이면 온 동네가 꽃 속에 묻힌 듯하다.
매해 이즈음이 되면 시간 날 때마다 집 앞, 뒤 포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웃들의 개나리, 진달래, 수선화, 벚꽃, 온갖 나무 꽃, 그리고 아직 솎아내지 않은 민들레꽃까지 즐긴다. 동화 그림 속의 한 인물이 된다.
이 그림 속에 15년을 산 우리도 그 일부를 예쁘게 칠하는데 한 몫 했다. 친정어머님의 꽃 사랑을 보고 커서인지, 나도 봄이 되면 어머님처럼 시간 나는 대로 마당에 나가 꽃과 야채를 키웠다. 수업이 없는 날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바로 마당으로 나가 점심식사도 잊은 채 일하다가 오후에 아이 데리러 갈 시간이 되어서야 깜짝 놀라 후다닥 나가곤 했다.
하지만 수많은 날 아침, 마당엔 어제까지도 예쁘게 올라오던 꽃들이 목만 댕강 남은 채 무참하게 잘려져 있었다. 30여 개 호스타스의 목이 몽당 잘려졌던 일은, 교외 집의 마당에 사는 사슴들이 밤 마실 나왔다가 너무 오래 노는 바람에 옆집 뒷마당에 잠깐 갇혔었기 때문이 확실했다.
옆집 뒷마당 작은 숲엔 야생토끼 가족이 사는데 거의 매일 우리 마당으로 건너와 논다. 그때마다 귀엽고 예뻐했는데, 튤립이 꽃도 못 피운 채 잎과 줄기를 잘린 건 아무래도 그들 짓이었다. 처음엔 ‘너희도 먹고 살아야지’ 하고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야채 밭의 옥수수, 상추 등 막 싹을 틔운 야채까지 눈치 없이 너무 먹자, 나는 전쟁을 선포했다.
밤낮으로 망을 보다 뛰쳐나가 소리도 질러보고, 고춧물도 뿌려 보고, 울타리를 높게 둘러도 보았지만, 지는 쪽은 항상 나였다. 결국 야채밭을 포기하고 포치의 화분에 토마토, 가지를 키워 먹었다. 다람쥐들이 가끔 속을 썩였지만 우리도 좀 거둬 먹었으니 그런대로 해결책이 되었다.
하지만 꽃밭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작년엔 꽃밭 전체에 얇고 검은 망을 꿰매 붙여 씌웠다. 멀리서는 잘 안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볼만했다. 망을 씌운 6-7평 꽃밭. 상상만 해도 갑갑할 광경이었다. 게다가 장미, 수국 꽃 높이가 자랄 때마다 망 높이를 높여 주어야 했다. 일 주일에 한두번 높여 주어도 꽃과 가지들은 열심히 망 사이를 뚫고 나왔다.
그래도 내 꽃들이 모두 끝까지 잘 자라 활짝 핀 채 온전히 거기 있었다. 난 14년 만에 승자가 되어 매일 함박웃음 속에 마당을 서성거렸다. 잔디 깎던 중 망 한쪽이 기계에 말려들어서 엉겹 결에 뜨거운 엔진을 만지는 바람에 남편이 손가락 몇 개에 2도 화상을 입었다. 그래도 꽃만 생각하면 행복했다.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날,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 커피를 마시며 꽃들을 자랑스럽게 둘러보던 중이었다. 매일 그러듯 망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비 두 마리를 날려 보내고 돌아서는데, 죽어서 땅에 떨어져 있는 예쁜 나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나가려고 애쓰다 죽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뭔가에 맞은 듯 머리가 띵 했다. 아, 이게 무슨 망발이었나! 아이가 어렸을 때 그렇게 졸라대도, 새를 장 속에 가두는 게 싫어서 새를 키우지 않은 나였는데. 우리 속의 동물 보는 게 맘 졸여서 동물원에 가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는데. 그런 내가 아무도 안 하는 짓, 꽃을 망 속에 가두어 키우는 짓을 하다니!
사람이 목적 하나에 몰두하니까 이렇게 눈이 머는구나! 망을 당장 거두었다.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김보경 /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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