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잠자는 시간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육체적으로 산적된 피로를 푸는 때문만은 아니다. 깨어 있을 때의 내 욕망을 누적시키는 일을 잠시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매일매일 나를 채우는 욕망은 그나마 밤이 있어 조금은 안심이다.
내일은 내일의 욕망이 있어서 흐르는 시간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밤이 앗아가 버린다.
때론 가질 수도 있고 손에 잡히기도 하는 욕망이기도 하지만, 또 어느 때는 터무니없는 크기로 내 자신에게 상해를 입히는 피의자가 되어 나를 괴롭게 만들기도 한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처럼 헛손질만 번잡이 되풀이 되는 내 욕망. 그 욕망이란 것은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어도 식을 줄을 모른다.
내 욕망 중, 내 평생 가장 그리워하며 꼭 이루었으면 하는 욕망은 향일암(向日庵)을 다녀 온 이후에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꼭 그 곳에서 그 길을 가고야 말 것이라는 철 늦은 다짐을 할 때가 많았다.
몇 년 전 11월 향일암이 위치하고 있는 여수시 돌산읍에 갔을 때 일이다. 풍치가 수려하고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라 각지에서 관광 온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으며, 코를 톡 쏘는 독특한 향의 갓김치를 먹으려고 더욱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저녁을 일찍 해 먹고 나서 돌산대교의 야경을 돌아보고 근처 민박집에서 주인과 담소를 하던 중 향일암의 해돋이 장관에 대하여 자세히 듣고는 내일 새벽에 오르기로 하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설치고 길을 나섰다.
캄캄한 새벽 향일암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은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발을 딛어야 할지 모를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오직 앞서 가는 사람들의 가쁜 숨소리와 발자국을 떼어 놓을 때 들리는 마찰음을 따라 올라가야 했다. 번뇌와 업보를 한 짐씩 걸머지고 무겁게 발을 옮기는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고 미명의 가파른 길을 오르고 있는 걸까? 한낱 해돋이를 보려고 그러는 것일까? 꼭 그게 목적이라면 서울 고층 아파트에서 맞이하는 해맞이도 다를 게 조금도 없지 않는가? 향일암 대웅전 앞에서 일출을 기다리는 30여명의 표정들은 경건하고 엄숙하기까지 했다.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나 주위를 둘러보는 사람은 없었다. 약속이나 하듯 모두의 시선은 해가 뜰 바다 끝 약간 훤한 하늘을 주시하고 있었다.
해가 뜨지 않는 날은 하루도 없건 마는 바다 속에 잠겨버린 해가 영원히 솟아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같은 것을 가져 보는 것은,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 온 인간의 오염된 마음 탓일 게다. 어찌 대자연의 반복되는 순환이 멈출 날이 있겠는가.
모진 겨울을 이겨낸 나무의 새순이 움터 올라오듯, 해는 어김없이 바다와 하늘의 틈새를 비집고 얼굴을 내밀었다. 이글거리는 놀림. 안개 속에서 붉은 회색의 꼬리를 거두고 물러가는 어둠의 뒤를 따라 향기로운 바람이 밀려온다. 때를 맞추어 검은 처마 끝에 회한(悔恨)처럼 매달려 있는 풍경이 비로소 맑은 소리를 뿜어낸다. 이 광경은 인간의 손끝으로는 엄두도 못 낼 자연의 극치였다.
어제보다 오늘 해돋이는 좀 나아지려니 하고 기대를 안고 올라 온 사람들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일지 모르는 미명(未明)의 바다를 향해 엄숙한 표정으로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무엇을 빌고 있는 것일까? 가지고 온 소원을 정성껏 다 올려놓는다. 함께 가지고 온 슬픔과 번뇌, 고통스런 마음은 모두 내어 놓는다.
은은한 아침 예불(禮佛)의 독경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스님의 향기로운 독경소리에 넋이 나가, 잠깐 눈을 암자 쪽으로 돌린 사이. 태양은 붉은 옷을 벗고 구름 속으로 얼굴을 살짝 묻었다. 마치 내가 이제껏 그렇게 과거를 살아 온 것처럼 구름도 해를 가려 주었다.
이봉호
수필가,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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