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는 ‘죽는다’는 말을 금기처럼 여겨 왔다. 기독교에서는 소천(召天), 불교에서는 열반, 입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돌아가셨다, 숨을 거두셨다, 운명하셨다, 생을 마감했다, 하늘나라에 가셨다, 세상을 떠났다, 임종, 사망, 별세, 작고, 서거, 영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대신한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의 경우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류 대속의 죽음이고 부활의 죽음이기에 상징적 의미가 강하다.
세계 어느 민족보다 한국인의 언어생활에는 죽음과 연관된 말이 많다. ‘우스워 죽겠네, 좋아 죽겠다, 보고 싶어 죽겠다, 죽고 못 살아.’ 이런 말은 실제 죽음과는 전혀 관계없이 생활 속에서 자주 쓰는 표현들이다.
감정이 격해서 ‘너 죽고 싶어?’하고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언어문화가 다른 미국 법정에서 살인 미수죄로 논란이 되는 예도 있다.
그런가 하면 소월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같은 유명한 시구를 남겼다.
‘죽기 아니면 살기’ 이것은 한국인의 근성이다. 특히 한국이 고속 성장을 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젖 먹던 힘까지 써서 온갖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지의 힘이다.
그러니까 성공률도 높지만, 자살률도 세계 1위다. ‘죽겠다’는 뜻은 다른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극한의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역설적 표현이다.
그런데 요즘 남북 관계를 보면 정말 ‘죽는다’는 표현이 가슴에 와 닿는다. 햇볕 정책으로 얼음이 풀리는가 싶더니만 오히려 당근 맛만 알게 해 주었다. 북한의 인권은 최악이다. 그때 인권 회복을 조건으로 햇볕을 퍼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북한은 지금 관광이나 공단을 통한 외화 벌이도 없고 민간 차원의 지원도 지지부진하고 북미 회담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체제 유지를 위한 긴장 고조는 절실한 상황이다.
그러니 핵무기를 앞세워 ‘너 죽고 나 죽자’고 생떼를 쓰고 있다. 전쟁만은 죽기 살기로 막아보자는 남한은 인내에도 한계가 있으니 행동으로 응징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마치 일촉즉발의 폭풍 전야와 같다.
전쟁은 함께 죽자는 최악의 선택일 뿐이다. 그걸 알고 도발을 일삼는 그들이 미워 죽겠고 무모한 죽음 앞에 오열하는 유족을 생각하면 기가 막혀 죽겠다. 지혜로운 아버지는 형제끼리 싸울 때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두 사람을 다 훈계한다.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태도이다. 한반도를 정략적 기지로 이용하지 말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야 한다. 동족상쟁의 비극은 역사의 가장 큰 치욕으로 길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영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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