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가주 가수 박래일씨의 아픈 가족사
▶ 1967년 사라진 아버지, 44년 흘렀지만 가슴에 있어
6월은 같은 민족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한국전쟁이 발발한 달이다. 아직도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은 헤어진 친지와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6·25를 앞두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가진 이들의 사연을 공개한다. <편집자 주>
경비병의 눈을 피해 북한을 내 집 드나들 듯이 왔다 갔다 하고, 내부 동태를 살피는 등 정보를 빼오는 임무를 맡는 특수 요원.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007의 제임스 본드와 흡사하다. 현실 속에서 만날 가망성이 없고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관심꺼리다. 일반인들이 느끼는 흥미와 달리 가족들의 마음은 어떨까.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수로 활동하는 박래일씨의 아버지는 북파 첩보원으로 활동하다 1967년 행방불명된 박종승(78)씨다.
그래서 아버지날인 이맘때만 되면 박씨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사부곡은 더욱 애달프다.
박종승씨는 스무살 동갑내기 이종례씨와 결혼해 고창에서 세 남매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던 평범한 농부였다.
그런 박씨가 처음 가족에게 어디간단 말도 없이 사라진 건 1964년 이었다.
갑자기 증발한 남편 대신 부인 이씨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말로는 다 못할 고생을 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967년 초가을 어느 날 박래일씨가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박씨는 아버지가 검은 지프차를 타고 두 명의 건장한 체구의 남성들과 집 앞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것이다.
지난 3년간의 행적을 묻는 어머니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그는 “특수임무를 띠고 북한에 두 번 갔다 왔다”고 털어놓았다.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된다는 말과 함께 열흘 후 다시 타고 왔던 지프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게 박래일씨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세월이 지난 2000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고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는 등 남북관계가 해빙기를 맞자 박씨는 쉬쉬하며 살았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놓기 시작했다.
정부를 상대로 사라진 아버지의 행적을 찾는 등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리고 2년만인 2002년 전사처리 돼 국가유공자 명단에 올랐다. 박종승씨의 이름은 충청남도 국립 현충원에 특수임무수행자로 분류된 비석에 새겨져 있다.
지난해 어머니와 함께 현충원 찾았던 박씨는 “이제는 국가 유공자 가족, 가수 박래일로 불리고 싶다”며 “아버지가 북한 어딘가에 살아계실 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가 199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발매한 1집 ‘잊을 줄 몰라’에 그의 심경이 담겨있다.
‘조국이 우리를 버릴 지라도 우리는 조국을 버린 적 없다’ 수증기처럼 사라진 북파 공작원의 딸로 살아온 박씨가 분단된 조국과 아버지에게 바치는 노래다.
박종승씨의 행적은 5,000여명의 미확인 북파요원들과 함께 영원한 미궁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김판겸 기자>
작년 국립 현충원을 찾은 박래일씨와 어머니 이종례씨가 특수임무수행자 묘비 앞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는 모습.(명단 제일 밑에 박종승씨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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