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값싸고 효과적으로 구경하고 싶은 사람에게 유레일 패스보다 좋은 것은 없다. 이 패스 한 장이면 기차를 타고 유럽 전역을 누빌 수 있다. 돈을 조금 더 주면 침대칸을 이용할 수 있는데 하루 종일 파리 시내를 구경하고 밤차를 타면 다음 날 아침 로마에 도착한다. 호텔에서 자는 것보다 훨씬 쌀 뿐 아니라 아까운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유레일 패스가 통하는 것은 철도만이 아니다. 지중해 연안을 운행하는 배도 공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이탈리아-그리스 노선인데 오후에 이탈리아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면 다음날 그리스 파트라스 항에 도착한다. 배를 타고 올 때 좀 일찍 일어나면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에서 노래한 ‘장미 빛 손가락의 새벽’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어둠과 구름을 뚫고 부드러운 핑크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지중해의 태양은 떠오르고 시간이 갈수록 바다는 ‘포도주 빛’으로 변한다.
이런 대자연의 풍광과 함께 그리스에는 무궁무진한 유물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깎아지른 벼랑 위에 신전을 세운 ‘세계의 배꼽’ 델포이, 인류가 지은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파르테논, 아테네 앞바다를 내려다보는 수니오 언덕의 포세이돈 신전 등등. 이런 곳에서 시인 묵객이 쏟아져 나온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다 옛날이야기다. 지금 그리스는 국민들이 정부의 긴축 재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며 건물과 차를 부수고 경찰과 치고받고 있다. 정부가 지출을 줄이고자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그리스 GDP의 130%에 달하는 국채는 이대로 가면 수년 내 200%를 돌파할 것이 확실시 된다. 200%가 아니라 300%, 400%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물론 그러기 훨씬 전 국가 부도 사태가 발생하고 나라는 엉망이 되겠지만.
그리스 정부 목표는 향후 40년 동안 국채 비율을 GDP의 60%로 낮추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정 적자의 주범인 연금 지출을 줄여야 하는데 그리스 국민들이 그것만은 불가하다고 들고 일어선 것이다.
지금 그리스의 1인당 GDP(2만7,000달러)는 독일의 절반밖에 안 된다. 그러면서도 1인당 최고 연금액은 2,500유로로 독일보다 20%가 높다. 2004~2006년 사이 독일은 연금 수혜액을 한 푼도 올리지 않았는데 그리스는 매년 3~4%씩 올렸다.
독일은 유럽 경제의 중심으로 중화학, 기계류, 자동차 등 여러 분야에서 강한 경쟁력을 갖춘 기업을 갖고 있는데 그리스의 산업이란 위대한 선조들이 남겨준 유물을 바탕으로 한 관광 말고는 변변한 것이 없다. 그런 나라 사람들이 독일인보다 많은 돈을 받으며 노후를 즐기겠다니 아무리 그리스의 풍광이 아름답다지만 이는 좀 심한 생각이다.
유럽 각국은 그리스가 구제 금융을 받으려면 연금제 개혁을 포함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하라고 나오고 있는데 그리스 정부는 의회에서 개혁안을 통과시키지 못해 쩔쩔 매고 있다. 그리스 자체는 규모가 작지만 이웃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등이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어 그리스가 무너질 경우 연쇄 부도 사태가 우려된다. 이렇게 되면 유럽은 물론이고 가까스로 미국 발 금 융 위기를 벗어나려 하고 있는 세계 경제가 극심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진짜 문제는 남부 유럽이 아니라 미국이다. 미국 국채의 GDP에 대한 비율은 현재 100% 선이다. 이대로 가면 메디케어 펀드는 수년 내 바닥나고 소셜 시큐리티 또한 고갈되는 것이 시간문제다. 사람들은 점점 더 오래 살고 의료비용은 점점 더 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가혹한 긴축 재정이 불가피하고 지금 그리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미국에서 일어나는 것은 필연이다. 옆집에서 불이 나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불조심할 생각은 안 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기 집에서 불장난만 계속한다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미 국민과 정치인들은 더 늦기 전 하루속히 정신 차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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