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생활 30년. “그렇게 오래 해먹은 의원이 있어?”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입법부 직원으로 강산이 세 번 바뀌는 걸 지켜봤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주미대사관 입법관을 지낸 이한길씨. 1979년 입법고시(4회)로 공직에 나간 그는 법제실장, 국회 법사위 전문위원 등 요직을 거쳐 지난해 1급 관리관으로 명예 퇴직했다. 변호사가 되어 워싱턴으로 돌아온 그를 만나 공직생활의 뒷얘기, 워싱턴에서 만난 대권 주자들의 숨겨진 비화, 앞으로의 활동 계획 등을 들어봤다.
-한국에서‘부르는 데’가 많았을 텐데 왜 워싱턴으로 왔나.
국회에서의 오랜 경력에다 미국 변호사 자격이 있으니 퇴직 후 로펌 등 여러 곳에서 오라는 제의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가족들과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았다. 11년 전 워싱턴 대사관에 발령받아 올 때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 3학년이었다. 한국으로 복귀한 후에도 기러기 가족으로 7-8년을 살았다. 돈과 명예보다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30년이면 국회의 산 증인이다. 대한민국 법률 중에 이한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라는데 어느 정도인가.
법을 전공(한양대 법학석사)했기에 국회 내에서도 법률을 만드는 부서에 주로 근무했다.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으나 3천 건이 넘는 정부 법률, 의원 법률을 만들고 심사했다. 평생 법 만드는 일만 한 것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파동으로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을 당시 소위‘탄핵 이유서’작성에 관여했다던데.
당시 법사위 전문위원으로 있다 보니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직무상 맡게 됐다. 3명의 전문위원들이 국회에서 헌법재판소에 보내는 ‘탄핵심판 청구 이유서’를 작성했는데 이때가 공직생활 중에 제일 힘들었다.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
-주미대사관 입법관으로 워싱턴과 인연을 맺었다. 대사관 직원의 눈으로 본 한인사회는 어땠나.
사실 업무가 너무 바빠 한인사회와 교류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요즘 보니 동포들이 대사관에 서운한 이야기를 하는 걸 종종 듣는다. 변명은 아니지만 대사관 직원들의 일이 너무 많다보니 서로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제 내 자신이 한인의 일원이 됐으니 대사관과 한인사회의 소통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무료 자원봉사 역할을 하고 싶다.
-여의도는 물론 워싱턴에서 많은 유력 정치인들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요새 잘나가는 박근혜, 손학규, 그리고 당시 잘 나가던 이회창 씨는 어땠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워싱턴에서만 세 번을 모셨다. 여자지만 나약한 분이 아니다. 아주 강하고 철학이 뚜렷하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14시간이상 타도 자세 한번 흐트러지 않으셨다. 한번은 강서면옥(현 이가) 주방장이 대사관으로 전화를 해왔다. 육영수, 이순자 여사 시절에 청와대 주방에서 일했다는데 박 전 대표에 밥 한 끼라도 꼭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이순자 여사 시절에는 혼을 많이 났는데 육 여사는 너무 잘해줘 그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 이야기를 전했더니 박 전 대표는 감격해 빡빡한 일정을 쪼개 그 식당을 찾아 점심을 함께 했다.
또 한 번은 유명한 스토커가 한국에서 워싱턴까지 따라 붙었다. 덜레스 공항에서 귀국길에 오른 박 전 대표를 만나려고 자꾸 시도해 비행기 기장에 접근 금지를 부탁하기도 했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학생운동 경력 때문에 이미지를 아주 강하게 느끼는 분들이 많은데 의외로 부드럽고 남에 대한 배려가 깊다. 권위의식이 없고 향기가 나는 분이다. 우래옥에서 어떤 분들과 식사를 하는데 도와주던 대사관 직원들을 다 부르더니 같이 식사를 하게 할 정도로 소탈하신 분이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3김씨에 필적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대단한 분이셨다. 워싱턴에 함께 온 의원들이 그 앞에서는 꼼짝도 못했다.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진중하신 분으로 어느 의원도 범접 못할 포스를 지녔다.
-주미대사들도 여러 분 겪었을 텐데.
양성철 대사와 오래 근무했다. IMF 이후라 힘든 시기였다. 양 대사님은 미 의원 200명 이상을 직접 만날 정도로 바쁘셨다. 손님 치를 일이 많은데 경비절약을 위해 양 대사 부인이 매번 직접 주방에 쪼그려 앉아 음식을 장만했다. 부인은 ‘난 국제 식모’라며 웃으셨지만 너무 힘들어하셨다. 이홍구 대사님은 집무실에 늘 국악이 흘러 인상적이셨다. 총리를 지낸 거물이신데다 잔소리 않고 직원들이 알아서 일하게 하는 스타일이라 인기가 좋았다.
-언제 변호사가 됐나. 워싱턴에 사무실은 냈나.
아메리칸대 로스쿨을 나왔다. 현재 인연이 오래된 한상준 변호사 사무실에서 그를 돕고 있다. 사무실을 내 본격적으로 돈 벌 생각은 없다. 요즘 2년 가까이 책을 쓰고 있는데 곧 출판돼 나온다. 이민법을 쉽게 설명하고 영주권자가 꼭 알아야 할 한국 법률문제 100가지 사항을 선정해 알기 쉽게 설명한 것이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나.
당분간 대사관의 순회 영사업무에서 무료 법률봉사활동을 하고싶다. 한인들이 궁금해 하는 한국 법률문제, 예를 들면 이중국적, 병역, 재산, 결혼과 이혼, 호적 문제 등을 상담해주려고 한다. 내가 한국의 법 전문지식을 가진 만큼 한인들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한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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