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 칼럼] 권영국 ㅣ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나는 가난한 농부의 맏아들로 자랐다. 초등학교 때는 가난한 도시락이 부끄러워서 도시락 뚜껑을 열어놓고 밥을 먹지못했다. 노란 조밥이나 깡 보리밥에
고추장이나 된장이 담긴 가난한 도시락이 그렇게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삼년을 재수하고 대학에 입학했더니 고교동창 친구는 졸업반이였다. 그것도 부끄러했던 기억이 난다.목회를 하면서 목회가 제대로 안될 때에는 주보에 매주 실리는 주일출석 통계와 헌금통계를 부끄러워하기도했었다. 장애자로 태어난 그 자식이 부끄러워 밀알 사랑의 학교에 못보내시고 숨겨두는 어떤 부모님 처럼 나도 성격장애로 힘들어하는 교인을 부끄러워하기도했었다. 그래서 그를 비난하고 정죄하기도했다.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용서받은 탕자의 이야기가 나온다.인생에 실폐자가 된 둘째 아들이 너무 배고파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지만 자기 꼬라지가 너무 부끄러워 고향마을 동구 밖에서 머뭇거릴뿐 차마 아버지 집으로 들어오지를 못한다. 그때 그 모습을 멀리서 알아차린 아버지가 버선발로 달려나가 그 부끄러운 아들을 껴안고 울고 또 울었다. 그러고는 동네사람들을 다 모아서 잔치를 열어 그 부끄러운 아들을 자랑하였다. 내 죽었던 아들이 돌아왔다고 덩실 덩실 춤을 추었다. 그런데 그 형은 동생을 부끄러워했다.. 그는 실패자 동생의 과거를 들쳐내고 판단하며 비난하며 욕을하였다. 그런 동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버지의 처신 마져 부끄러워하며 비난했다. 그 마음에 법은 있었지만 인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내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이모습 이대로 받으시고 자랑스러워하시는 분이 계신다.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가던 절대적으로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시는 분이 계신다. 그분이 바로 나의 사랑 예수님이시다. 히브리서 2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나같은 인간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시는 분이시다.예수님의 짧은 일생은 무지무지한 부끄러움과 비난의 일생이셨다. 태어나실 때에도 부끄러운 말밥통에서 태어나셨고 자라나실 때에도 부끄러운 난민촌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에서 자라나셨다. 학벌이 없다고 가방끈이 짧다고 그렇게 비난받으셨다. 돌아가실 때에도 인류 최대의 수치와 부끄러움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본체가 자랑스러운 영광의 하나님이시요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예수님은 부끄러운 죄인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부끄러워 질까봐 예수님 자신이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끄러운 인생들을 받으시어 당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그 부끄러운 죄악을 다 씻기시고 자랑스러운 인생으로 바꾸시며 기꺼이 우리들의 형님이 되어주신 것이다.
나는 요즈음 그렇게 못나보이든 교인들이 그렇게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워졌다. 몇년간 그렇게 목장을 잘 섬겨오다가 마음에 심한 부상을 입고 누워지내는 목자님들도 목녀님들도 이제는 판단이 안간다. 왜 그렇게 누워지내느냐고 부끄러워하거나 왜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비난할수가 없다. 다만 그나 나나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누워지내는 그를 생각만해도 측은한 마음이 내 속에 돌아서 눈물이 고이기 때문이다.
(새누리선교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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