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파본 사람이 배고픈 사람을 도와 줍니다. 몸이 아파본 사람이 아픈사람의 가장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언어와 문화와 민족과 종족이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충격의 강’을 건너본 사람은 그 ‘충격의 강’에서 좌절하고 고통하는 사람들을 도울수가 있습니다. 죄의 삯인 ‘죽음의 강’을 예수님은 건너서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의 강’에서 허덕이는 우리 인간에게 오직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18살 때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어한 똑똑한 독일 청년이 대학에 가는대신 자신의 의사와 아무상관없이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에 소집되어 독일병사가 됩니다. 많은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문화와 언어와 족속의 ‘충격의 강’을 건너는 체험을 합니다. 순수하였던 청년이 독일병사로 연합군과 싸우다 전쟁포로가 됩니다. 수년간
전쟁포로로 감옥에서 절망가운데서 살았던 이 청년은 종전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1964년에 한권의 책을 펴냅니다.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입니다. 60년대 후반부터 전세계에 가장 큰 신학적인 영향력을 끼친 몰트만이라는 신학자입니다.
4년동안 몰트만은 문화와 언어와 종족을 초월하게한 ‘감옥속의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면서 극심한 고통속에서 희미한 하나님의 소망의 빛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은 더 가까이 더 확실히 그를 찾아옵니다. 미군병사가 넣어준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감옥속의 디아스포라’인 몰트만은 스스로 죄인되어 인간의 죄의 고통을 지고 가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면서 오랜 감옥을 떨치고 영혼과 육신의 진정한 ‘샬롬,’ 즉 평안을 체험합니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절망속에 빛으로 온 소망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몰트만은 외칩니다. 기독교는 자체가 희망입니다. 생명력입니다. 전적인 소망으로 가득찬 것이 기독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소망은 고통속에서만 보입니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은 그 고통속에서 자신은 죽어가지만 숱한 사람을 살리는 소망의 멧세지를 부활을 통하여 남깁니다. 존 스톳트의 말대로 예수님은 ‘멧신저요 멧세지’였습니다. 누가 멧신저와 멧세지의 삶을 살수 있습니까? 스스로 고통을 맛보고 그 고통을 이기며 남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는 예수님을 닮은 ‘멧신저요 멧세지’가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통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살아갑니다. 주변에 나보다 늦게온 디아스포라의 겪는 아픔을 잘 알기에 저들의 손을 잡아주고 마음을 감싸 줄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외칩니다.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이 고통을 이기고 승리할수 있습니다. 부활은 절망속에 확실히 보이는 소망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디아스포라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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