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대신 닭이면 어떠랴. 사하라가, 명사산이 너무도 보고싶던 차였다. 꿈꾼다고 뭐든 금방 이루어지던가. 아직은 시절인연이 닿지 않은 것이라고 자신을 다둑인다. 대신 규모는 작을망정 제법 사막다운 사막이란다. 서부에 지천으로 깔린 메마른 황야가 아닌 모래로 된, 뜻 그대로의 사막이라니. 뜻밖의 횡재를 만난 양 모랫벌로 지체없이 달음질쳤다. 방울뱀과 전갈을 조심하라는 경고문도 아랑곳 않는다. 나이마저도 마구잡이로 내닫는 발길을 어쩌지 못한다. 무한대로 열린 사막은 아니나 그윽하니 깊은 골짜기도 있다. 사구도 엎디었다. 그 위로 길고도 완만하게 그어진 능선의 실루엣이 가슴을 요동치게 만든다.
금빛 모래 알갱이의 감촉은 따스하면서도 아주 부드러워 모성의 자애를 연상시킨다. 엄마품에 안기려는 아이처럼 푹푹 빠지는 그 모래언덕을 허겁지겁 기다시피하며 정신없이 올라간다. 마치 금세 사라지고 말 무지개나 좇는듯이. 사실 해가 뉘엿거리고 있었다. 한바탕 바람이 쓸고 지나가면 수많은 모래주름들이 흔적없이 지워지고 말듯 황혼이 내림과 동시에 어둠 속으로 묻히고 말 시간의 자취들이다. 무질서한듯 정연하게 무늬진 추상화가 보고싶어 내심 조바심이 났다. 한 걸음 오르면 반 걸음은 미끄러져 내리니 마음만 바쁠 밖에는. 데스밸리의 여정에서 특히 사막지대가 주목할만하다며 안내에 나선 딸은 광기에 다름아닌 나의 흥분된 서두름에 슬몃 웃음 짓는다.
언덕에 오르자 아무나 붙잡고 춤이라도 출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울음이 북바칠 것도 같다. 실없이 헤실거려진다. 한껏 소리치고도 싶다. 환희작약에 빠진 나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다. 한바탕 기분좋게 미쳐버린 채 사막과 하나가 된 순간이다. 능선의 정상 저 건너로 아득히 이어지는 모랫벌. 일망무제로 펼쳐진 사장 앞에 잠시 우두망찰, 그리고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얼마나한 내공을 쌓아야 이렇듯 허심하게 아무라도 기꺼이 품어안는 경지에 이를건가. 잠시후 해는 기울었다. 모래밭에 새겨진 물결무늬가 차츰 암각화처럼 음영짙게 깊어갔다.건조한 사막의 밤하늘에 이내 초롱한 별들이 떠올랐다. 청남빛 우단에 촘촘 박힌 영롱한 보석처럼. 이슬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밤 사막의 정취에 한없이 젖어들어갔다.
내가 사막에 대해 연정을 품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인간의 대지>로부터 비롯됐을 것이다. 그 책을 되풀이해 몇 번이나 읽었다. 누구에게든 적극 추천하는 권장도서목록 첫째이기도 했다. ‘단단한 나무에 꽂힌 칼처럼 부르르 떠는 비행기가’ 추락한 곳은 사막 한가운데. 목구멍이 석고처럼 굳어가는 갈증과 거센 모래폭풍과 얼어붙는 밤의 냉기와 그늘없이 맞서야 하는 폭염에 내동댕이쳐진 두 비행사가 있었다. 최후의 마지막 물 한 방울을 나눠마시고나서 하나가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독백을 한다. "내가 우는 게 나 때문인 줄 아나." 그렇다. 내가 만약 이 세상에 혼자였다면 그대로 뻗어버렸을 거,라던 그의 말대로다. 관계의 고리 그 절절한 연대감 때문에라도 절망의 끝자락에서조차 살아야하는 게 인간 아니던가. 나 또한 바로 그 귀절에 자신을 칭칭 동여매고 지탱해온 세월이 있기도 하다.
2
황막하기 그지없는 데스 밸리 가는 길목에 덤으로 누린 사막이었다. 사막을 뒤로하고도 한참동안 나는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만큼 사막은 긴 여운으로 내 안 깊숙이에 자리잡았으니 어쩌면 주객의 전도다. 행선지는 데스밸리이니까. 절망의 심연인가 하면 영원으로 드는 분기점인 죽음을 한번쯤은 관조해보게 하는 그런 장소. 너나없이 엇비슷하게 희비를 겪으며 사는 심상한 일상사 가운데 자주 맞대면하게 되는 화두 죽음이다. 선지식들은 생사를 하나로 파악한다. 그 차원까지야 어림없지만 밤마다 잠이 들며 나는 작은 죽음을 경험하곤 한다. 눈 감으면 어둠과함께 의식도 눈 감기며 한 세계가 닫히고 만다. 영구히든 잠시이든 모든 것들과 일단은 작별이다.그러나 약속처럼 아침, 눈을 뜨므로 나는 다시금 새롭게 태어나는 신생의 부활을 누린다. 하여 나직한 속엣말로 아직은 유예된 시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리게 된다.
황무지에 핀 드문드문 들꽃과 록키의 연봉들을 좌우로 거느린 채 한정도없이 달린다. 일망무제로 쫙 뻗은 도로. 집은커녕 오가는 차도 한 대 없다. 문득 질주본능을 자극한다. 그래서인지 제한속도 표지판이 자주 나타난다. 가물대는 지평선 저 끝은 감질나게 아득하다. 아스팔트 위로 물이 흐르듯 번질거리는 신기루 현상이 언뜻언뜻 일렁댄다. 볼품없이 이어지던 바위산 모퉁이를 돌아서자 널펀펀히 드러나는 데스 밸리. 서반구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낮다는 자리다. 반면 인근 가까운 휘트니산은 미국 최고봉으로 사철 만년설을 이고 있다. 아주 오래전, 노다지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가던 사람들이 이마 위에서 해가 뱅뱅 도는 끝모를 하얀 소금밭에 갇혀버린다. 타는 목으로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다가 죽을 힘 다해 겨우 그 자리를 모면한 다음 죽음의 계곡이란 지명을 던졌다던가.
발 아래 대지는 시멘트 바닥같이 단단하니 고르다. 시야 가득 허연 소금층이 고루 펼쳐져 눈쌓인 평원을 이뤘다. 생명이 도통 숨쉬지 않는 땅일까, 사위는 헛헛하도록 고요하기만 하다. 창세기 이전의 텅 빈 태초, 아니면 묵시록 이후의 침묵처럼 풍경이 워낙 삭막하다보니 그 생경스러움에 질리다못해 주눅이 들 지경이다. 백지마냥 비어지는 머리. 먹먹하기도 하고 숙연하기도 한 채로 허툰 말마디마저 잠겨버린다. 사방을 둘러보지만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미적 요소란 무엇에도, 아무데도 찾을 길이 없는 그곳. 하긴 미식가들이 더러는 거친 음식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자극적인 변화를 즐기듯, 혐오감이 드는 파충류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별난 취미도 있듯, 그럼에도 묘하게 사람을 유혹하는 황막강산이 데스밸리구나. 사막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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