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역사적인 5가 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한 목사의 증조부인 한석진 목사(1868-1939)는 한국 기독교의 개척자이다.
1891년 마펫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그해 언더우드의 집에서 열린 신학반에 참석하여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환되는 믿음’을 얻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크리스천 공동체인 의주교회 교인으로 시작한 그는 평양교회를 창립했으며 장로교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다. 1907년 장로교회 최초의 목사로 장립된 그는 길선주 목사등과 함께 한국장로 교회 정치의 기초를 세웠다.
1892년 조사로 출발한 그는 1939년 73세로 소천하기까지 의주,평양,서울,마산등서 목회를 했으며 일본까지 가서 학생 선교를 개척했다. 한석진목사는 한국 장로교 초대 서기와 제6대 총회장및 한국 NCC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교파간 장벽을 무너뜨린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였으며 나라의 독립을 교회의 독립과 신앙의 독립차원으로 승화 시킨 애국자요 신앙인이었다.
한 목사는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건립후 1939년 8월 20일 “죽는것도 주님의 뜻”이라는 말을 남기고 별세했다. 새문안교회에서 영결 예배후 망우리에 묻혔으나 한경직 목사의 노력으로 1989년 영락공원 묘지로 옮겨 안장되었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앞줄 왼쪽부터 한석진,이기풍,길선주,송인서, 뒷줄 왼쪽부터 양전백,서경조, 방기창, 이들 7인은 마펫 선교사로부터 안수를 받고 다 목회자가 됐다 <사진 한석진 목사 손자 한화림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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