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엔 어린이날이 따로 없지만 아이들이 어린이날만큼 신명나는 날이 바로 할로윈이다. 이번 할로윈에도 기괴한 복장을 한 아이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캔디를 동냥했다. 미국인들은 3명중 2명꼴(63.8%)로 할로윈을 즐기며 그 놀이를 위해 물경 58억 달러를 쓴다(2009년 통계).
요즘엔 한국 귀신들도 할로윈 바람을 맞고 국적불명의 귀신이 됐다지만 할로윈의 할자도 몰랐던 옛날엔 한국적 정서의 귀신얘기가 많았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그 많은 귀신 가운데 달걀귀신을 가장 무서워했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하얀 달걀귀신이 뒷간(요즘 화장실과는 개념이 다르다)에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믿고 밤엔 꼭 엄마를 대동해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달걀귀신이 할로윈을 1주일 앞둔 지난 24일 미국 고등학교의 현대식 화장실에 나타났다. 손에 부엌칼을 든 처녀가 뛰쳐나와서 거울을 보며 얼굴 매무새를 고치고 있던 두 여학생을 다짜고짜 찔렀다. 달걀귀신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할로윈보다 더 무서운 이 사건으로 시애틀 북쪽의 스노호미시 고교는 발칵 뒤집혔다. 칼에 가슴과 목을 찔린 14세 9학년생은 중태에 빠져 입원가료 중이고 팔과 등에 경상을 입은 다른 9학년생은 치료 받고 퇴원했다. 이들을 찌른 15세 10학년 여학생은 무려 100만 달러의 보석금을 책정 받고 화장실이 아닌 카운티 구치소 안에 달걀귀신처럼 웅크리고 있다.
범행 여학생은 경찰에 “왠지 누군가를 찌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백팩엔 범행에 쓰인 부엌칼 외에 또 다른 칼이 들어 있었다. 지난 4월에도 급우의 남자친구를 죽이겠다고 협박해 정학 당했다가 정신과의사의 ‘OK 소견서’를 학교에 제출하고야 교실에 복귀했다. 그녀는 지금도 정신병 약을 복용 중이며 정신건강 전문가의 장기상담을 받아왔다고 했다.
미국의 각급 학교는 할로윈과 관계없이 달걀귀신 아닌 정신이상자들의 살상무대가 돼왔다. 지난 1999년 4월20일 콜로라도 덴버 인근의 콜럼바인 고교에서 두 12학년생의 무차별총격으로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이 숨지고 21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다른 3명은 대피과정에서 다쳤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고교 학살사건이다. 범행을 저지른 두 학생은 자살했다.
그로부터 꼭 8년 후인 2007년 4월 16일 기억에도 생생한 버지니아공대의 조승희 사건이 터졌다. 심한 조울증환자였던 조승희는 교정에서 두 차례 무차별총격을 벌여 32명을 살해하고 25명에 중경상을 입힌 후 자살했다. 역사상 단독범으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이 학살사건의 범인이 ‘코리안’으로 밝혀지자 전국의 한인들이 한동안 고개를 못 들었다.
그밖에도 1966년 8월1일 텍사스 대학(오스틴)에서 해병 복학생의 무차별총격으로 16명이 죽고 32명이 부상당했다. 최악의 학교 살상사건은 1927년 5월 18일 미시간주 배스에서 터졌다. 한 농장주가 초등학교 건물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키고 군중이 모이자 또 자살 폭탄차량을 폭발시켜 도합 어린이 38명, 교사 2명, 학부모 4명이 죽고 58명이 다쳤다.
이번 스노호미시 고교의 칼부림 사건은 피살자는 없지만 충격적이긴 매한가지다. 남학생 전유물이었던 캠퍼스 살상사건이 15살짜리 여학생에 의해 총이 아닌 칼로 저질러졌다. 다른 대형 살상사건들처럼 ‘묻지마 식’ 범행이었다. 사건에 연루된 세 소녀는 서로 생면부지이다. 가해 소녀의 말대로 피해소녀들은 ‘운 나쁜 시간에, 운 나쁜 장소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두운 면이 있으면 밝은 면도 있게 마련이다. 사건이 일어난 스노호미시 고교는 물론 동네 라이벌 학교인 글레이셔 피크 고교 학생들도 자성하는 분위기다. 특히 글레이셔 학생들은 스스로 이번 할로윈에 스노호미시 고교 응원단의 공식 색깔인 붉은색, 흰색, 검정색 옷을 입었다. 두 학교 학생들이 사랑으로 일체가 돼 충격을 극복하자는 뜻이었다.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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