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소 현
<극작가, 시인
미주 한인사회의 문화예술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뜨거운 사막바람에 숨이 콱콱 막힌다.
오래 전의 일이 가끔 떠오른다. 할리웃의 배우 오순택 선생이 젊은이들과 극단을 만들어 활동할 때니까, 그럭저럭 20년 전쯤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할리웃에서 활약하는 한인이 거의 없는 딱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오순택 선생이 나서서 후배들의 앞길을 터주고, 주류사회 진출을 돕기 위해 극단을 창단한 것이다.
LA시의 문화기금을 얻어 자그마한 극장은 겨우 마련했는데,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당시 돈을 무척 많이 벌며 무서운 기세로 떠오르는 한인 사업가를 찾아갔다.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도 제법 관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몇 다리 걸쳐 소개에 소개를 통해 정말 어렵게 만나, 희망찬 포부와 계획을 설명하고 정중하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그 사업가의 한 마디에 오순택 선생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북풍한설처럼 매서운 한 마디!
“연극이요? 당신네들 취미생활에 내가 왜 힘들게 번 돈을 내야 합니까?”
당신들의 취미생활?! 더 무슨 말을 하랴! 그 당시 오순택 선생은 잘 나가는 직업 배우였고, 그런 경험과 발판을 살려 후배들을 이끌어주려고 연극을 하겠다는데… 취미생활이라니! 실제로 그때 그 극단에서 활동하던 젊은이들 중 여러 명이 지금 할리웃에서 각광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그런데도, 돈 많이 번 그 부자 양반 눈에는 그런 치열한 몸부림이 그저 취미생활로밖에 안 보인 것이다. 슬프고 화가 나지만 어쩌랴.
자업자득이요, 뿌린 대로 거두리라. 문화예술 활동에만 목숨을 걸고 전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니 ‘취미활동’이라고 구박해도 달리 할 말이 없다. 실제로 지금 우리 동네 문화마당에서 예술활동만으로 밥을 먹는, 그러니까 ‘풀타임 아티스트’ 또는 ‘전업 예술가’는 정말 몇명 안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려고 다른 일에 대부분의 노력과 시간을 바치면서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연극 하고, 음악 하고, 춤 추고… 그렇게 안타깝고 힘겨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물론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도 한국도 매몰찬 현실은 어슷비슷하다. 규모가 좀 다를 뿐…
그러니까, 취미생활이라고? 그건 예술가들을 두 번 죽이는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지 못하는 현실도 서러운데, 그런 비아냥거림까지 들으면…
더 화가 치미는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당신들의 취미생활’이라는 시각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문화행사를 위해 후원자들을 구하러 다니려면 그런 푸대접쯤은 늠름하게 이겨내야 한다. 그 때마다 화를 내다가는 혈압이 올라 명이 짧아질 것이 분명하니, 술 한 잔에 취해 복권이라도 맞기를 기도하곤 한다.
무슨 방법이 없나? 정말 없나? 물론 있다. 독자나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한 방에 해결된다. 공짜책, 초대권만 바라지 말고 동참해 주면… 그런데 관객들은 말한다. “재미만 있으면 오지 말래도 가지! 여기서 하는 것들은 어딘가 궁상맞고 후줄근하고 재미가 없어서 말이야… 강부자나 고소영이나 원빈 나오는 연극 좀 하라구, 그럼 만사 제쳐놓고 갈 테니까. 아니면 TV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던가.”
만드는 사람들은 힘없이 중얼거린다. “누군 몰라서 못하는 줄 아세요! 화끈하게 좀 도와주시면 다음 번에는 우리도 잘 할 수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관객들밖에는 해결책이 없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가난하지만 진짜로 가슴을 쾅 울릴 수 있는 명작(?)을 만들어야겠지. 돈만 있다고 좋은 예술이 나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나저나, 죽을 때 죽더라도 여한 없이 최선을 다한 작품 하나는 해보고 싶다. 이 동네 예술가들은 오늘도 그런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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