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윌리엄 베버리지라는 사람이 있었다. 명문대 출신으로 변호사가 된 그는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갖고 빈민 구호 사업을 하다 이들을 제대로 돕기 위해서는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궁핍, 질병, 무지, 열악한 환경, 실업을 5대악으로 규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국민들에게 현찰과 헬스케어, 교육과 주택, 취업을 알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부모의 자녀 육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아동 양육비 보조와 학교 무상급식을 요구했다.
1942년 그가 작성한 방대한 ‘베버리지 보고서’는 복지국가 탄생의 토대가 되며 이에 근거해 1948년 7월 5일 전 국민 의료제가 실시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 때다. 전후 궁핍에 시달리던 영국민들은 두 손을 들어 이를 환영했고 여행자까지 아프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영국은 지상낙원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보편 복지의 대가는 컸다. 이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국민의 최고 실질 소득세율은 99%까지 올라갔다. 고소득자는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기에 바빴고 아예 국적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고소득자와 재산가가 영국을 떠나고 국민들은 더 많은 서비스를 요구하면서 영국 경제는 빠른 속도로 무너져갔다. 고실업, 고인플레, 저성장으로 요약되는 소위 ‘영국병’에 걸린 영국 경제는 70년대 내내 빈사상태를 헤맸다.
1979년 시장주의를 내걸고 ‘복지국가’에 대대적인 수술을 시작한 대처가 등장해서야 병자 영국의 증세는 호전됐다. 최고 세율을 60%로 과감히 낮추는 한편(후에 40%로 다시 조정) 노조의 위세를 꺾고 사회 복지 비용을 줄이면서 비즈니스는 다시 숨을 쉬고 투자가들은 돌아왔으며 정부 재정은 적자 홍수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대처는 온갖 인신공격을 받았고 사회는 오랜 파업과 과격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영국의 얘기는 선진국 공통의 얘기다. 미국도 루즈벨트의 소셜 시큐리티부터 존슨의 메디케어에 이르기까지 사회 복지 프로그램은 국민들의 환호 속에 제정됐다. 그러나 이제 이들 모두 장기적으로 미국민들에게 엄청난 재정 부담을 지울 것이 확실시된다.
날로 늘어만 가는 재정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초당적으로 만들어진 ‘수퍼위원회’가 향후 10년간 1조2,000억 달러에 달하는 적자 감축한 합의 도출에 실패하고 문을 닫을 모양이다. 공화당은 최후의 보루로 여겨오던 증세에 합의해 주는 대가로 사회 복지 프로그램의 구조적 수술을 요구했으나 민주당은 이를 거부했다. 앞으로 1년간 양당 간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국방을 비롯한 정부 예산은 일정 비율로 자동 삭감된다.
복지는 한번 주기는 쉽지만 이를 거둬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럴 경우 쏟아질 유권자의 분노를 감당할만한 용기와 사명감 있는 정치인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한국판 ‘베버리지의 환생’ 박원순 서울 시장은 “복지는 시혜가 아닌 권리”라고 주장하며 대학생들에게 “무료 등록금 실현을 위해 투쟁하라”고 선동했다.
영국과 미국, 그리고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두 눈 뜨고 보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잘 살아야 한다는 진보의 이상과 지난 수 십 년 간 시장 경제 체제를 통해 축적한 부, 그리고 표를 얻는데 특효약인 선심이 한데 합쳐질 때 이를 당할 장사는 없어 보인다. 다른 모든 선진국이 걸은 길을 한국만이 예외로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산업 혁명을 제일 먼저 해 세계 최고 부자였던 영국이 전 국민 보편 복지를 실시해 거덜 나는데 30년이 걸렸고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야 개혁의 길로 돌아설 수 있었다. 세계에서 고령화와 저출산이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은 아마도 속도가 그보다 조금 빠를 것이다. 직접 겪지 않으면 배우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가 보다. 후대의 자손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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