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천일의 약속’서 알츠하이머 걸린 이서연 열연
"어느 순간 고통을 즐기기 시작".."지금은 살짝 건드려도 바스러질 듯"
"각오했던 것보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또 즐거웠습니다. 연기하는 동안에도 또 작품을 끝낸 지금도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에 휩싸여 지내고 있습니다. 제 기분을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것 같아요."
수애(33)가 말문을 열었다.
’천일의 약속’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가씨 이서연을 온몸으로 연기하며 바닥까지 무너져내린 그다.
드라마 종영 후 10여일 만인 4일 남산의 한 호텔 꼭대기 층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커다란 창 너머 탁 트인 시야만큼 수애의 표정도 투명했다.
하지만 그는 "내 속도 뻥 뚫려 있는 느낌"이라며 "현재 무기력증에 빠져 있고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바스러질 듯 아프다"고 토로했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병 알츠하이머에 걸려 발버둥치고 절규하다 끝내 사라져버린 이서연. 연기 생활 10년차의 수애는 이 어려운 미션을 맡아 열심히 싸웠고 잘 마무리했다. 방송 내내 시청자로 하여금 ‘내가 수애야’라고 외치게 하는 신드롬을 일으키며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넘치는 사랑을 받아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며 "이 작품으로 최고와 최악의 상황을 계속해서 넘나드는 묘한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SBS는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그에게 최우수연기상을 안겼다. 그러나 그는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말들이 많았다.
단도직입적으로 인터뷰에 돌입했다. 그는 처음 10여 분간 쉬지 않고 속에 있던 말을 쏟아냈다.
다음은 일문일답.
--시상식에 왜 불참했나.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에 휩싸였다. 완전한 무기력증에 빠졌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사실 드라마를 끝낸 직후에는 오히려 너무나 멀쩡했다. 4-5일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친구도 만나러 다니며 서연이를 완전히 잊은 듯했다. 작품을 끝내고 이렇게 홀가분해했던 적이 없었다. 주변에서 ‘네가 다 쏟아내서 그런가보다’고 했고 그 말을 믿었다.
그런데 웬걸, 5일 정도 지나고 갑자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외로움과 허탈함이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그러더니 하루 16시간씩 죽은 듯이 잠만 자기도 했고, TV조차 켜기 싫은 상황이 됐다. 그래서 시상식에 못 갔다. 과분한 사랑을 받았기에 당연히 올바른 처신을 했어야했는데 도저히 그 자리에 설 수가 없었다. 힘들게 마라톤을 뛰고 난 뒤 물 한잔 마실 시간 없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죄송했고 시상식 당일 오후까지도 고심했지만 도저히 복잡한 심정으로는 여러분 앞에 웃으며 나설 수가 없었다. 여러 오해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결코 내가 오만하거나 뭔가를 더 바래서 안 간 게 아니다.
나 자신 오만한 사람이 되지 말자, 주변에 누가 되는 행동을 하지 말자고 늘 주문한다. 어쩌면 모든 배우가 다 똑같은 감정이었을 텐데 내가 너무 유난을 떨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 상태였다. 물론 상은 너무나 감사하고 잘 간직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난 ‘천일의 약속’을 통해 많은 것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오늘 인터뷰에 나선 것은 더는 혼자 이러고 있지 말고 이야기를 통해 속에 쌓인 것을 털어내자 싶었기 때문이다.
’천일의 약속’을 끝낸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거대한 산을 넘은 듯하다. 촬영장면마다 감히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표현하기 위해 나와 싸움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그런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쾌감도 느꼈다. 이서연이라는 인물을 배우로서 좀 빨리 만났다는 생각도 들지만 하는 내내 감정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발악하며 치열하게 달려들었다.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많이 배웠다. 얻은 게 너무 많은 것 같다. 어쩌면 그래서 내 안이 너무 꽉 차서 비우는 작업이 힘든 것 같다. 끝내고 나니 내 속이 뻥 뚫린 듯하면서도 동시에 너무 꽉 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증에 빠진 것 같다. 버릴 건 버려야 하는데 그 통로를 못 찾아 헤매는 느낌이다.
왜 ‘천일의 약속’이었나.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지 않나. 처음에 대본을 받아보고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다른 작품 같으면 마지막에 주인공의 치매로 끝맺을 이야기를 ‘천일의 약속’은 1회에서 서연의 치매가 드러나고 3회에서 바로 받아들이는 내용이 그려졌다.
과연 그다음에는 어떻게 펼쳐질까 궁금했다. 그러다 감독과 첫 미팅을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자리에서 구두로 출연합의를 하게 됐다. 감독이 ‘수애 씨 말고는 생각한 사람이 없다’며 잘해보자고 해서 얼결에 출연하기로 한 게 됐다.
하지만 그 미팅에서 돌아온 직후 부담감이 확 밀려오면서 못하겠다 싶었다. 내공을 더 키우고 맡아야 할 역 같았다. 내가 작품을 망칠 것 같았고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며칠 고민 후 역할을 고사하기 위해 감독을 다시 만났다. 그 자리에서 울며불며 못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소속사 대표가 ‘수애야, 지금 네 모습이 바로 서연이야. 말의 속도, 톤 등이 바로 서연이야’라고 하더라. 그 말에 살짝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촬영 며칠 전까지도 대본 연습에만 다녀오면 울면서 못하겠다고 끙끙댔다. 그러다 5부 정도 대본을 보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이와 교감이 이뤄졌고 서연의 고통을 표현하는 데 짜릿함 같은 게 느껴졌다. 희망과 기대감도 들었다. 그게 방송 보름 전이다.(웃음) 그제야 부담을 좀 떨쳐냈다.
알츠하이머 연기가 어땠나. 이서연의 고통을 얼마나 알고 표현했다고 생각하나.
▲기억을 잃고 아이가 된다는 일반적인 상황 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과정에 호기심이 들었다. 후반부에는 촬영장에서 동료 배우들이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만 마주치면 눈물이 나오니까. 매순간 내가 곧 이서연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다.
지난 4-5개월간 수애는 없었다. 대사가 두세 페이지씩 됐는데 NG를 거의 안 냈다. 대사를 늘 입에 달고 살았고 집에서도 내가 이서연이라고 생각했다. 김수현 작가의 대본은 너무 깊고 아팠다. 작가도 이번 작품을 통해 뭔가를 쏟아내는 느낌이었다.
-아픈 역이어서 꾸미지 않았지만 이번 작품에서 유독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내가 생각해도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어 감사했다.(웃음) 솔직히 아파 보이게 분장하면 연기가 더 쉽다. 하지만 감독은 서연이가 눈과 마음으로 소통하기를 원했다. 서연이가 기억을 잃으면서 외관상 ‘꼬질꼬질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독은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돌봐주는 고모가 서연을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서른세 살이 됐는데 배우로서, 자연인으로서 어떤가.
▲자연인으로서는 30대를 즐기고 있다. 20대 때는 모든 게 두려웠고 스스로 많은 것을 차단했다. 지금은 조금은 즐기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여행이든, 사람과의 관계에서든 호기심이 많이 들고 그것을 충족하려고 한다. 다만 배우로서는 지금 이 순간도 치열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영화 ‘님은 먼 곳에’를 통해 배우로서 성장했다고 생각하는데 이후 ‘심야의 FM’ 등을 만나면서 조금씩 나 자신을 넓혀나가는 느낌이다. 덕분에 주변에서도 많이 믿어주는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여유를 찾고 싶지만 아직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 책임감이 더 강해진다. 자연스러운 연기, 일상 연기를 하고 싶다. 눈빛과 얼굴로 읽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알츠하이머를 연기했는데, 혹시 잊고 싶은 기억은 없나.
▲초등학교 때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많은 부분을 미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워낙 힘들게 자랐기 때문에 내가 좋았던 것만 부각시켜 각색해 그 시절을 추억하고 있었다. 좀 힘들고 안 좋았던 부분은 많이 버리고 살려고 한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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