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LA 집에서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아들의 전화번호임을 확인하고 “애비냐?”하고 물으면 갑자기 아이 웃음소리가 까르르 터진다. 4살짜리 손녀가 혀 짧은 말로 “할아버지, 나야, 놀랬지?…”라며 놀린다. 심심하면 아빠 핸드폰의 ‘직행번호’를 눌러 할아버지를 놀려먹는 장난에 재미를 붙인 듯하다. 그런 손녀가 전혀 괘씸하지 않고 오히려 기특하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손자손녀의 친구라는 말이 생긴 모양이다.나처럼 손자손녀의 친구가 돼줄 노인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새로 65세가 돼 노인칭호를 듣는 사람이 매일 수천명에 달한다. 60여년 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가 잇달아 은퇴하기 때문에 손자손녀의 친구가 돼줄 할아버지․ 할머니 사태는 향후 수십년간 이어진다. 오는 2050년까지 미국 노인들은 인구 5명 중 한명 꼴로 늘어나고, 전 세계적으로는 60세 이상이 20억명, 80세 이상이 4억 명에 달하게 된다.이들 노인이 손자손녀의 친구가 돼 주는 것은 대부분 본의가 아니다. 많은 노인들이 65세 후에도 일하기를 원한다. 일 자체를 즐기는 사람, 사회생활에 미련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처럼 노후대책이 부실한 사람들이다. 그달 그달 페이첵이 아니면 당장 생계와 의료보험 혜택이 막연해지기 때문에 늙어도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처럼 경기침체가 장기화될 때는 자진 은퇴하는 노인이 매우 드물다.지난해 미국의 전체 노동력 가운데 노인 근로자가 처음으로 10대 근로자를 앞질렀다. 워싱턴주 상황도 비슷해서 현재 65세 이상 노인들이 7명 중 한명 꼴로 직장에 고용된 상태다. 지난 20년간 거의 두 배 늘어난 셈이다. ‘예비 노인’인 55세 이상 근로자도 지난 1990년엔 전체 노동력의 10% 미만이었으나 2010년엔 20% 이상을 점유해 역시 20년 새 두 배로늘어났다. 앞으로 노인 근로자가 더욱 많아진다는 뜻이다.전문가들은 노인 근로자들이 많아진 데는 ‘유인(pull)’ 및 ‘강제(push)’ 요인이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전자에는 일을 즐기는 사람, 건강이 좋은 사람, 여유시간이 많은 사람, 더 좋은 집을 장만하려는 사람 등이 해당되고, 후자에는 저축, 연금 등 노후대책이 빈약한 사람, 장성한 자녀를 부양하거나 학비부담 등 뒷바라지가 끝나지 않은 사람, 이혼한 탓에 혼자 벌어먹어야 하는 사람 등이 해당된단다. 하나마나한 소리다.알고보면 노인 근로자들은 실업률도 일반 근로자보다 낮다. 연방통계에 따르면 작년 11월 65세 이상 근로자들의 실업률은 6.7%로 전체평균 8.2%를 훨씬 밑돌았다. 문제는 은퇴 후 새로 직장을 구하기가 보통 힘든 게 아니라는 점이다. 취업하는데 걸리는 시일이 16~19세 청소년은 평균 21.6주, 대학을 갓 졸업한 20~24세 청년은 34.6주가 소요되는데 반해 65세이상은 무려 62.7주가 소요됐다. 전체 평균은 41.1주였다.한물간 노인들보다 팔팔한 젊은이들이 쉽게 채용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고용주들이 노인 취업신청자에게 대놓고 “나이가 너무 많다”며 퇴짜 놓치는 않는다. 그랬다가는 차별금지법에 걸린다. 십중팔구 “우리는 회사와 함께 성장할 젊은이를 선호합니다”라거나 “선생님처럼 경력이 길고 다채로운 분이 우리 회사 일을 하려면 아마 굉장히 따분하실텐데요…”라고 둘러댄다. “딴 데 가서 알아보라”는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한다.정초부터 김새는 얘기를 했지만 이는 65세 이상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40~50대 장년층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 이들은 요즘 노인들보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는 만큼 노후 실업기간도 길어진다. 그때쯤이면 소셜시큐리티 연금이 쥐꼬리처럼 줄어들지도 모른다. 아예 바닥이 나버릴 수도 있다. 아직 2012년 신년결의를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장기 노후대책에 관한 결단을 내리는 게 좋다. 20~30대들도 결코 이르지 않다.그나마도 때를 놓친 노인들은 기꺼이 손자손녀의 친구가 돼줄 준비를 하자.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직 손녀가 전화를 걸지 않았다. 은근히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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