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의와 타협 않고 전국을 방랑하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쓰다
“타향 땅 밟아서 돈지 십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에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여기 고국 근세 조선시대 학자로서 공명정대한 지성을 간직한체 혼탁한 시류에 동화되지 않고 백년설이 부른 나그네의 노래처럼 복으로 안시 향령,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에 이르기까지 10여년을 방랑 하면서 지성의 정론을 펼쳤던 그 옛날 그 사람 매월 “김시습”(1435-1493)을 소개 한다. 서울 성균관 부관의 사저에서 출생, 태어난 지 8개월만에 글을 깨달았고 3세 때 한시를 짓고 5세 때 4서 3경을 통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5세 때에는 세종대왕(1397-1450) 앞에서 글을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 하던 중 수양대군(1417-1468세조)이 어린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모두 불태운 후 정처없이 유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사육신이 참혹하게 죽자 그 시신들을 거두어 묻어준 숨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방랑 하면서도 ‘탕유관서록’ ‘탕유관등록’ 탕유호남록‘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를 썼다.김시습이 하루는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의정 정찬손을 만나 그의 거만한 태도와 사람을 무시하는 표정에 그의 면전에서 “야! 정찬손아 이제는 그만 물러가라,”고 쏘아 붙쳤고 판서 서거정이 지나는 길이 통제되자 “야아! 강중아 그 동안 무고하느냐?” 광태를 불렀다고 한다. 그는 이처럼 현실의 불의와 타협하는 인간들을 조소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반항과 허무의식으로 49세 되던 성종 14년에 서울을 떠나 하늘을 지붕삼고 그림자를 벗 삼아 치는 물결, ?茶릿 낙엽, 떠도는 구름처럼 시대의 반항과 허무주의속에 정처없이 방랑의 길을 떠났다. 김시습, 그는 현실에서 이룰 길 없는 그의 역량과 포부를 한탄하여 시대적인 고아로 불우한 생애를 마쳤으나 그는 고국이 낳은 특출한 예술가요정치가며 사상가였고 그의 사상에서 현실주의 속에 인본주의와 민본주의 사상은 율곡이 높이 평가 했다는 것이다.
1465년(세조11) 경주 남산에 금오 산실을 짓고 입산, 여러번 세조의 부름을 거절하고 자연과 책을 벗 삼아 지은 것이 바로 고국 최초로 쓴 한문소설 “금오신화”이다.
평생을 절개와 지조를 지키며 뛰어난 문장가로 고국의 문학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고1782년(정조6)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그 밖에 저서로는 “매월당 집” “십현 담요해” 등이 있다.
격변하는 고국의 정변속에 타협하지 않고 망명 길을 택해 이민 온 분들도 있을진데 쓰라린 지난날의 상처를 묻고 고국의 안녕과 동포 사회의 화합을 도모 하는데 일조 하였으면 한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