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3월 1일 정오에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삼천리 곳곳 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우리 고국 뿐만아니라 해외에서 살고 있는 동포 사회에서도 3. 1절 기념식을 거행하는 이유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무저항 비폭력 투쟁으로 일어났던 거족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3,1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윌슨(1856-1924)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영향이었다(1918,1). 당시 국내서는 고종(1852-1919)의 승하 원인이 일본의 독살설이 유포 되면서 민심이 동요하여 1919년 1월10일 고종의 장례일에 만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일제의 강압 정치로 모든 정치, 종교, 도덕, 윤리가 억압하고 타락을 조장시켜 거족적인 반발 심리가 민족 독립의 대한 열망이 된 요인이기도 했다.
기독교, 불교, 천도교가 3, 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일제의 종교 탄압 정치 때문이었다. 특히 3, 1운동 주도자 33인 대표 중에 기독교인이 16명이나 된 것은 1910년 8월 총독 정치하에 강제로 일본 천황 숭배의 신사참배 의식이 요구되었다. 이에 일제의 반감이 조성 되면서 기독교회가 독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명분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3, 1일 운동의 첫 시발점은 동경을 중심으로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한 유학생들이 2월 8일 YMCA 회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그 후로 기독교와 불교와 천도교가 민족의 대 거사를 위해 연합하여 3, 1을 거사일로 장소를 파고다에서 명월관으로 바꾸어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민족 대표 33인은 경찰에 체포 되었지만 만세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 되면서 경찰의 진압으로 제암리 동네가 폐허가 되었고 전국에서 만세 운동 횟수가 통계에 의하면 1,542회, 참가 인원 200만, 사망자 7,509명, 투옥자 47, 306명이었다.
3, 1운동이 독립은 이루지 못했지만 한민족의 자주의식과 독립의식은 국내외에 크게 고취 되었고, 일제의 강압 통치가 유화 통치로 바뀌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 당시 교회의 역할과 기독교적 의의를 볼 때 교회가 3, 1운동의 지주가 된 것은 교회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사회 속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예언자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는 사회 속에서 신뢰를 상실해 가고 있다. 교회가 이기주의 세속주의에서 방황 하거나 동화되어 기독교의 모습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다. 교회들이 바로서고 참 목자와 성도들이 진리를 사수해 나아갈 때 사이비와 불의가 사라질 것이다. 동포 사회 역시 애국 애족 사상보다 개인만을 위한 이기주의가 팽배해 가고 있다. 과거 조국 독립을 위해 이국땅에서 고생하며 모은 돈을 독립 운동에 보태던 선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가? 동포 사회가 서로 협력하고,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사명을 밝혀 나아가는데 앞장서기를 기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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