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복음중앙교회>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 에 울-릴때 사-나이 굳은마음-길-이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 이깊 었나“
선구자 가곡처럼 하늘을 지붕삼고 구름을 벗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청춘을 받친 사나이가 있으니 이름하여 “오동진”(1889-1944)독립투사를 소개 한다.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출생하여 고국의 선각자 안창호(1878-1938)선생이 세운 대성학교 속성사범과를 졸업한 후 후진 양성의 뜻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일신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던 중 1919년 3, 1, 민주혁명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분연히 일어나 각지를 다니면서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 하다가 3월 16일 조국의 독립 운동의 메카인 만주로 망명 하였다.
그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지를 쫏아 조국 독립 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분산되어 있던 청년단체들을 규합해서 대한 청년연합회를 결성하고 재무, 교육, 교섭, 교통부를 두어 활약 하면서 만주와 국내를 왕래하며 민중들을 모아 독립사상을 고취 시켰다. 1920년 7월, 상해 임시 정부의 방침에 따라 광복군 총영을 설립하고 그 단체의 총영장이 되었다.
광복군 총영에서 활동한 행적은 평북 벽동경찰서 3서 주재소와 여러 곳의 관공서를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고 악질 친일파와 군수, 면장 등을 사살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그들의 활동 중 괄목할 만한 것은 1920년 미국 국회의원들이 조선을 방문 했을 때, 조선인들이 일제의 끊임없이 저항하며 독립을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여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고자 각지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의거였다. 1920년 7월 광복군 총영의 군인출신들을 선발하여 평남, 안주, 평양으로 잠입하여 평남 도청 경찰부에 폭탄을 투척했고 8월 15일 의주와 8월하순 선천 경찰서 등을 파괴하는 등 눈부신 결사 항쟁을 하였다.
1922년 8월 이른바 8단 9회의 단체들을 통합하여 일제와 항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재만 한인을 선무, 보호하였다. 1925년 김창환, 지청천의 뒤를 이어 군사 위원장 겸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일제는 오동진 체포를 위해 현상금을 걸었고 일제 첩자를 통해 군자금 백만 원을 준다는 꾐에 빠져 1927년 12월 16일 하산 하다가 19일 길장선 흥륭산역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2년간 재판 끝에 우애노 판사는 오동진에 대해 그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면서 애석해 했다.그는 ‘치안유지법위반, 강도, 살인, 방화 등의 죄목으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끝내 감옥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광복 후 건국 공로훈장 증장을 수여 했다.
이민 동포들도 우리 조국이 선열들의 피눈물로 이룩한 나라이기에 고국의 대한 애국심과 동포애로 뭉쳐 멀-리서나마 고국의 번영을 기원 하며 더불어 살아가자. 성경은 말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요1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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