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색 바지를 입었다. 바지 보다 조금 연한 색의 코튼자켓을 걸쳤다. 속에는 크림 빛 가벼운 질감의 터틀넥 셔츠를 입고 대담하고 화려한 양말이 유행이라 하니 갈색과 오렌지색이 두드러진 무지개 줄무늬 양말을 골라서 신었다. 분을 바르고 빨간 립스틱으로 마무리한다. 옷차림에 무관심한 편이지만 나들이 할 장소가 미술관이니 아름다운 것만 보려고 온 사람들의 시선에 거슬리고 싶지 않다. 어울릴 듯한 색상의 스카프를 휘날리도록 길게 늘어뜨렸다. 침착한 걸음걸이로 미술관 계단을 오른다.
입구에서 안쪽으로 미술관 정원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정오의 환한 빛이 부서져 내리는 모네의 그림 속 지베르니 정원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새순이 돋아 아기 손 같은 시카모어 잎사귀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잔잔하게 반짝거리며 흔들린다. 마치 하늘에서 연두빛 색종이를 흩뿌리는 듯하다. 신록의 축제 분위기를 돋운다.
색색의 꽃들 사이로 고흐의 푸른 붓꽃이 단연 돋보인다. 산책길 옆 연못에는 연노랑, 분홍이 보일락말락하는 연분홍색, 하얀색의 연꽃이 피었다. 같은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른 빛깔을 가진 꽃이 크고 작은 접시 잎사귀 사이로 피었다.
흐트러짐 없는 연꽃의 자태를 본다. 순수하고 단정하고 고고하다. 저토록 엄정한 꽃잎의 자세를 다른 어떤 꽃에서도 본 기억이 없다. 오래도록 자세히 들여다본다. 볼수록 감탄의 탄식이 절로 나온다. 불가에서 연꽃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사바세계가 사악하고 더러운 아귀다툼의 진흙구덩이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그런 세파를 거쳐 단련한 다음 연꽃과 같이 화사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인생길이 완성 되어야 한다는 뜻일 거라고 짐작한다.
네덜란드 화가이면서 부르헤에서 활동한 <한스 멤링>의 초상화를 전시한다는 소식을 웹사이트에서 보았다. 꽃이 많이 핀 봄날에 미술관엘 가야지 하고 맘을 먹었다. 그날이 오늘이다. 15세기에 살았던 한 남자의 초상화를 오래도록 마주하며 멤링이 말하고자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림을 보는 취향은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어릴 적에는 남의 초상화는 왜 감상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초상화를 볼 때 눈을 반짝이며 제일 오래도록 쳐다본다. 한 인물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모델을 통하여 전달하려는 화가 자신의 이데아는 무엇인지 짐작해 본다. 또한 모델은 온 몸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다.
그림을 통해 화가와 모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재미가 너무 흥미진진하다. 옷차림, 포즈, 표정에서 엿보이는 감정의 상태, 성품, 취향, 지성미, 신앙심, 건강상태, 직업, 재력, 출신지 등 살면서 세상에서 맞딱 드리는 모든 것이 인물초상과 그 배경 속에 간직되어 있다. 그림 속 인물의 생을 분석하고 유추하는 재미 때문에 초상화 앞에 오래 머무는 것이다.
화가가 나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화실에 앉혀두었다면 나는 그림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묘사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어느새 든다. 멤링의 초상화 속 인물처럼 침착하고 담담하고 무심한, 그러면서도 강한 내면을 가진 이지적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을까하고 거울 속 나의 모습을 초상화를 보듯 뚫어지게 쳐다본다. 턱없이 부족하다.
허둥대며 살아온 모습이 고스란히 보인다. 아직도 부족한 뭔가를 갈구하는 심보를 숨길 수 없는 얼굴이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욕심, 불만, 질시, 미움 등 부정적인 감정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주름이 늘어가지만 화사하며 지극히 편안한 모습, 단아하며, 강인한 내면을 가진, 연꽃과 같은 미소를 머금은 사람의 초상화로 그려지기를 소망한다.
그러려면 내 마음 속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를 버리는 연습부터 먼저 해야 함을 깨닫는다. 그런 후에라야 화가가 나의 초상화를 멋지게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스 멤링이 오늘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 중 꼭 새겨야 할 말 같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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