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감동케 하는 노래가 있다. 물방울의 노래다.
“물방울이 비록 적고 적으나 넓고 깊은 대양 이루어지네 대양이 이루어지네” 그 노래의 가사다.
어린(유치원)시절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래다. 그것이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잠자던 나의 뇌리를 깨우고 있다. 그리고 나를 감동케 한다.
이슬비가 내린다. 초가집을 적신다. 물방울이 처마끝에 달린다. 그리고 떨어진다. 나뭇잎의 물방울도 마찬가지다. 땅으로 떨어진다. 하나씩 둘씩. 똑…….물방울이 깨지는 소리다. 땅을 적시는 소리다. 그리고 흙탕물이 되어 흐른다. 시궁창으로 개천으로, 시냇물로, 넓은 강으로, 넘실대며 넓고 깊은 바다에 이른다. 그것이 내가 평생 기억한 물방울의 노래다.
나는 물방울의 물리적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감동으로 보는 물방울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다. 물방울을 대양을 이루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넓고 깊은 대양이 적은 물방울을 만들려고 존재하는 것이다. 태평양 바다의 파도소리는 작은 물방울을 만드는 소리다.
그저 떨어지고 깨져서 땅을 적시기 위하여 물방울은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지 않으면 물방울이 아니다. 떨어지면 물방울은 깨진다. 산산조각 부서진다. 깨어지는 아픔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 아픔으로 물방울은 땅을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땅속에 숨겨진 생명체를 어루만져 키우고 있었다.
물방울은 창조의 원리이며 생명의 원천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보는 물방울의 새로운 모습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땅 위의 생명체는 지금 존재하지도 못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의 물방울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처마 끝에 달려있었다. 베드로도, 다윗도, 모세도, 아브라함도 모두 하나의 물방울이었다. 인간은 모두 하나의 물방울로 지름을 받았다. ‘인생은 초로’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물방울이다. 떨어지지 못하고 거기에 달려있는 이유는 거기에 감동이 없기 때문이다. 감동이 없으면 물방울은 물방울이 되지 못한다.
성경이 기록될 때 임했던 그 감동이다.
지금은 고난주간이다.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예수라는 물방울이 땅에 떨어져 부서지는 아픔이다. 그는 전 인류에게 영생이란 생명을 주시고 키우려고 땅을 적시는 물방울이다. 그는 베들레헴 말구유의 처마끝에 달려있었다. 33년 동안… 그의 영광은 우주에 가득 찰 적이다.
물방울이 주는 감동으로 나는 한국을 본다. 지금 한국은 하나의 물방울이다. 그것은 아시아의 지붕 처마 끝에 달려있다. 5천 년 동안 그곳에 달려있는 것이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한국은 동양의 등불, 그것이 켜지면 동양을 밝힐 것이다”고 예언했다. 거의 1세기전의 예언이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 말은 “한국은 동양을 적시는 물방울이다”는 뜻이다. 그것은 5천 년 동안 준비된 물방울이다. 동양을 적시고, 아프리카를 적시고, 세계를 적시는 물방울이 될 것이다.
한미 FTA는 그 등불을 켜는 행사가 될 것이다.
이홍섭
VACU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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