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교수 신문에서 올해의 사자성어로 ‘엄이도종’(掩耳盜鐘)을 선정했었다. 자기 귀를 막고 종을 훔친다는 뜻. 자기가 잘못 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비난을 듣기 싫어 귀를 막아 보지만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아마 올해에 한국, 미국에서 선거가 있으니 “정치 지도자들은 민심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는 뜻으로 ‘엄이도종’이 선택된 듯하다.
어찌 정치인들만의 이야기이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이야기를 경청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병원에서도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환자는 의사의 권고를 잘 들어야 함”을 날마다 실감하며 나의 부족함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귀를 막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 같다.
의사의 도움이 필요해 병원을 찾았지만, 정작 본인들의 이야기에 열중해서 의사의 권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분들이 종종 있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흔히 혈압이 매우 높으신 분들 중 “혈압 약을 한번 시작하면 평생 먹어야 한다. 혈압 약을 먹으면 혈압이 점점 올라간다” 라고 생각하셔서, 높은 혈압 때문에 심장과 뇌, 온 몸을 연결하고 있는 혈관이 시시각각으로 손상되고 있는데도 치료를 안 하시는 분들이 있다.
혈압 약은 내성을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 몸의 혈관은 세월에 따른 노화 현상으로 동맥경화가 진행되어 혈압이 점점 더 올라간다. 혈압 약의 부작용은 매우 적으며, 그 혜택은 아주 많으므로 혈압이 많이 높으신 분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약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동맥경화를 방지하기 위해 운동과 식생활을 개선해야 된다.
당뇨병으로 혈당이 매우 높으신 분들 중 “인슐린을 맞으면 끝장이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 혈당이 높아 몸에 당뇨 합병증이 생기려는 분들은 인슐린을 만들어 내는 췌장의 기능이 이미 거의 없는 상태이다. 이런 분들은 인슐린 주사를 맞으면 몸이 훨씬 가벼워지며, 당뇨 망막증, 신장부전, 심장마비, 다리절단 등 여러 합병증을 줄일 수 있다. 오늘날의 인슐린 주사약은 사람의 몸 안에서 만들어 지는 것과 똑같은 것이며 안전하다. 주사 바늘도 가늘고 간편해 졌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양약은 화공약품이라 생약보다 좋지 않고 부작용이 많다”라는 편견이 있다. 양약의 대부분이 식물에서 발견되었고, 그것을 정제해서 노폐물을 빼고 대량으로 만들어 낸 것이 오늘날의 양약이라고 보면 된다. 정제되지 않은 생약보다 훨씬 더 깨끗하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약이 싸게 보급되고 있는 것은 선구자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들은 그 혜택을 필요에 따라 누리면 된다. 비싼 생약들이라고 효과가 더 있고, 부작용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살아 갈수록 아집과 편견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며 놀란다. 배우려는 유연성과 변화와 도약에 대한 열정이 줄어들면서 나오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환자들 가운데 부부들이 함께 와서 이야기 하시면서 배우자 상대방이 얼마나 건강관리를 잘못하고 있는지 서로 의사에게 일러줄 때면 ‘엄이도종’ 이 생각나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런 중에도 나의 관찰 소견으로는 나이가 들어 갈수록, 여자 분들의 말씀이 맞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아저씨나 할아버지들이 문제가 더 많음이 객관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여자 분들은 자식들이나 손자 손녀들에게도 인기가 좋다. 병원에 모시고 오는 자손들이 어머니나 할머님들께 더 따뜻하게 대하는 것을 자주 본다.
나도 형님 댁에 계신 아버님을 오랜만에 찾아뵈었다. 어머님을 일 년 전에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신 아버님이 안쓰러워 잘 해드리려 했는데, 대화 중 아버님의 고집스런 편견에 불쑥 한마디가 튀어 나오고 말았다. “ 어머님이 왜 힘들어 하셨는지 이제야 알겠네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내가 부른다. “ 여보! 이리 좀 와 보실래요?” 왜? 또, 무슨 일을 시키려는 것일까? 귀를 막고 못 들은 체 해 버릴까?
김홍식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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