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좋아하던 맥주 대신 장미 열두 송이를 사들고 나섰다.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남가주 날씨답지 않게 잔뜩 찌푸린 하늘이 비를 흩뿌려 프리웨이를 적시기 시작했다.
옛 서류를 정리하다 그의 객사를 보도한 신문 기사 스크랩과 마주쳤다. ‘알코올 중독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최00 씨가 자신이 몰던 밴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짤막한 기사였다. 1997년 6월30일 오후 2시 가든 그로브 한인 상협 주관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 식순도 기사와 함께 보관돼 있었다. 조퇴를 하고 참석했던 최 씨의 장례식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A 마켓 앞 휑한 주차장에 마련된 그의 빈소. 영정도 없는 작은 소반 위에는 수박, 참외, 시루떡이 올랐고 엎어놓은 페인트 통 위에 놓인 향로에서 향이 타오르고 있었다. 평상복 차림의 조객들이 최 씨를 화제 삼아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아들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더니만.”
“페인트 일은 제 일처럼 꼼꼼하게 잘 했지. 일을 맡기면 신경 쓸 일이 없더라고.”
“겉보기와는 달리 속은 여간 여리지 않아. 많이 당하고 살았지. 안됐어.”
최 씨의 장례식은 J 목사의 집례로 진행되었다.
“그가 비록 불행한 삶을 살았다지만 법도와 양심만은 저버리지 않고 인생을 마무리했다는 지인들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정성어린 조위금 덕분에 시신은 로즈 힐즈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될 것입니다. 언젠가 그의 후손들이 뿌리를 찾아 그의 묘소를 참배할 때가 반드시 오리라 믿습니다. 후손들이 번성하고 성공하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최 씨를 만난 곳은 1976년 미국 이민 직후에 다니던 한인교회였다. 이민 정착의 첫 관문인 운전면허 실기시험에 떨어져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전직 택시기사였다는 최 씨를 소개받았다. 미혼이었던 그는 담임목사 댁에서 잠시 기거하고 있었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그의 인상은 좀 험상궂었다. 툭 불거져 나온 광대뼈, 가늘게 째져 치켜 올라간 두 눈, 얼굴에는 칼자국 같은 상처마저 있었다. 그 험한 인상으로 몰아붙이는 강도 높은 속성 운전교습 덕분에 나는 다음날 재도전에 성공했다.
그와의 인연은 꽤 끈질겼다. 어느 주말 그는 해군 사병 차림에 카메라를 어깨에 걸치고 나타났다. 월남 피난민인 부모를 따라 세 살 때 부산에 정착했다는 그는 바다 사나이였다.
“형님요. 사진 좀 찍어주소. 부산 색싯감에게 보낼끼라예.”
그는 나를 차에 밀어 넣더니 라구나 비치로 향했다. 호화 요트, 갈매기와 수평선을 배경으로 한껏 폼을 잡는 그를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는 결혼을 한다며 한국으로 갔다. 몇 개월 뒤 신부와 함께 나타난 그는 나를 형님이라고 신부에게 소개했다. 주말이면 종종 맥주 따위를 사들고 그들 부부는 나를 찾아왔다. 그는 열심히 페인트 일을 하며 신혼가정을 꾸려 나갔고 그토록 원하던 아들도 얻었다. 그러나 최 씨의 결혼 생활은 삐꺽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음주벽이 도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아이가 첫돌을 지낸 어느 날, 그의 아내는 아이와 함께 바람과 같이 사라져버렸다.
그와의 추억을 반추하는 사이 프리웨이를 벗어나 로즈 힐즈 메모리얼 파크에 이르렀다. “묘소 위치를 하나 찾아 주시겠습니까?”
나는 최 씨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사망 일자를 적어 담당 직원에게 건넸다. 컴퓨터 자판을 한참 두들겨대던 직원이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런 이름은 여기 없습니다.”
나는 둔기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 잠시 넋을 잃고 멍하니 서있었다. 도대체 최 씨가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경주 최’ 씨인 그가 득남을 했을 때 ‘가든 그로브 최’ 씨의 시조가 되었다며 기뻐하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래도 내가 다시 그를 찾아 나서야 할 것 같다. 훗날 ‘시조’를 찾아 헤맬지도 모를 ‘가든 그로브 최’ 씨의 후예들을 위해서.
황시엽
W.A.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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