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이 집필한 문답 형식의 자서전 ‘그녀, 패티김’ 출간
"미8군쇼 오디션을 보고 합격하자마자 미8군 쇼단에서 노래를 하다가 조선호텔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도쿄를 간 거야. 일본으로. 굉장한 일이지."(61쪽)
가수 패티김(본명 김혜자)에게는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다닌다. 해방 후 첫 일본 진출, 솔로 최초 미국 진출, 한국인 최초 미국 뉴욕 카네기 콘서트홀 공연, 공연 이름으로 ‘리사이틀’이라는 단어 첫 사용 등 55년 음악 인생 그 자체가 대한민국의 대중가요사다.
올해 2월 은퇴를 선언한 패티김이 절친한 후배 조영남과의 문답 형식을 빌려 자서전 ‘그녀, 패티김’을 펴냈다.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넉 달 동안 주고받은 이야기에는 가수 패티김에 가려 숨어 있던 인간 김혜자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중학생 때 우연히 몇 소절 뽑은 국악 가락을 범상치 않게 들은 학교 선생은 그를 국립국악원에서 무료로 배울 수 있게 해줬다.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천상 가수’였던 것. 패티김은 그 시절 연습한 발성이 평생 노래의 기초가 됐다고 고백한다.
그는 1958년 미8군 무대에 올라 팝송 ‘틸’ ‘파드레’를 부르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눈부신 조명을 받으며 무대 위에 선 단 한 사람, 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악단, 열광하고 환호하다가 마침내 내 노래가 시작되자 숨죽이고 들어주는 관객! (중략) 그때부터 무대가 내 삶이 됐지."(170쪽)
패티김은 관객을 앞두고 느껴지는 짜릿한 긴장감에 매료됐다. 그는 1960-70년대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올라 ‘초우’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서울의 찬가’ 등 숱한 히트곡을 남겼다.
55년 가수 생활 중 최고의 무대로 패티김은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공연을 꼽았다. 공연장, 오케스트라, 목소리 상태의 삼위일체가 완벽하게 이뤄졌다는 것.
어느 무대에서나 완벽을 기하는 그는 스스로에게조차 칼같이 엄격하다. 노래 전 몇 시간부터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을 뿐더러 무대 의상을 입고 나서는 의자에조차 않지 않는다. 옷자락의 주름 하나조차 용납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게 패티김이야. 열심히! 한번 시작하면 내가 꼭 그만둬야 될 게 아니면 나는 절대로 포기는 안해."(312쪽)
이혼과 사업 실패 등 인생의 파고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을 수 있던 건 노래를 향한 불 같은 열정 덕분이다. ‘패티김 다운 것’이란 곧 ‘열심히 사는 것’이다.
돌베개. 456쪽. 1만9천500원.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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