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카란다는 어느 블록을 돌아가나 눈에 띄었다. 푸른 하늘 아래 핀 풍성하고 짙은 보랏빛 꽃을 올려다보며 가슴이 저릿했다. 그리움으로 멍든 가슴이 짙어지면 저럴 거란 생각을 하고 또 했었다.
25년 전 봄이었다. 빨랫감을 들고 이웃집의 세탁장에 가는 길이었다. USC 부근 엘런데일 길에는 저소득층 히스패닉계가 많이 살았다. 좁은 싱글아파트에 아이들 서넛과 부모가 닭장처럼 침대를 포개놓고 사는 모습을 지나가면서 엿볼 수 있었다.
그곳의 가난하고 교육수준 낮은 사람들도 자식들을 건사하면서 잘 사는데 배울 만큼 배운 나는 지금 여기서 무얼 하나 싶었다. 팔에 힘이 빠지면서 빨래 바구니를 놓칠 뻔 했다. 무책임한 엄마라는 자괴감이 가슴을 찌르는 듯 했다. 가난하지만 자녀들과 부대끼며 사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참으며 올려다 본 하늘에는 때마침 낯선 이국에서 처음 대하는 자카란다의 무성한 보랏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움으로 상심에 빠진 마음을 절절히 표현하는 듯했다.
연년생인 두 아기를 한국 부모님께 맡기고 미국으로 남편의 공부를 위하여 왔었다. 이곳의 형편을 살펴보고 아이들을 데려온다는 계획이었다. 금방 데리러 간다던 계획이 1년 4개월이 되었다. 한참 커가는 아기들에게나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하루가 천년같은 시간이었다.
아들의 대학원 졸업식이 5월 마지막 주일에 있었다. 졸업식장으로 가는 도로변에 보랏빛 자카란다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어려운 공부를 마친 졸업의 기쁨을 자카란다는 지그시 누르며 차분하게 했다.
비즈니스 중 최고의 비즈니스는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라고 했다. 엄마로서 그 말이 뇌리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이 경제적인 대비와 대책이었다. 자식 보살피기는 어느새 뒷전이 되기 일쑤였다. 경제적인 문제로 아이들과 헤어져 살아야했던 아픔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한국에 두고 왔던 두 아이가 이제는 성장해 경제적으로 독립하니 부모로서의 일은 끝난 것 같다. 아들은 대학원을 다닐 때 학비와 생활비를 융자로 충당했지만 조금씩의 푼돈이 들었다. 일년 일찍 대학원을 졸업하여 직장생활을 하는 딸은 무슨 기념일이 되면 아이패드, 양털부츠 등 제법 비싼 선물을 나에게 했다. 그때 두고 왔던 두 아이에게서 앞으로는 받는 것이 더 많을 것 같은 예감도 든다.
해마다 자카란다는 아픈 기억을 되살렸다. 보랏빛 꽃을 볼 때 마다 나는 두 아이에게 미안한 심정으로 살아왔다. 아이들을 떼어놓은 미안함이 나를 어쩔 수 없는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으로 만들어 버렸다. 두 아이의 행복을 위하여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는 어리석은 고리오 영감 못지않게 맹목적인 사랑을 가진 엄마의 마음이다.
로스앤젤레스 거리에는 지금 화려한 보라색 자수를 놓은 듯 자카란다가 한창이다. 이젠 그리움과 미안함을 내려놓고 싶다.
그때 아이들을 두고 가라던 시부모님 말씀이 섭섭해서였는지 아이들 길러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적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아이들을 빼앗긴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말로만 건성으로 감사드린다고 했던 것 같다.
두 아이를 기르는 것이 그 연세에 쉽지 않은 희생이었음을 내가 그때의 시어머님 나이가 된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진실인지 시간은 언제나처럼 뒤늦은 깨우침을 준다.
7월이면 아들은 할머니가 입학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던 의사로서 첫 월급을 받는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진달래색 꽃 한아름 사들고 할머니 산소를 방문할 것을 권할 것이다. 자카란다는 어쩔 수 없이 깊은 그리움과 후회와 죄송스러움의 꽃으로 평생 내 가슴에 새겨질 것 같다.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보고 싶고,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괴로움이 밀려올지라도 열심히 궁리하며 즐겁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살이다. 성경말씀대로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살 것이다.
윤선옥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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