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대들은 결혼하고 나서야 햇수를 챙기면서 만남을 기념하지만, 요즘 젊은 연인들은 결혼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만난 첫날부터 계산하여 만남을 기념한다. 게다가 해나 달이 아니라 오십 일, 이백 일 등 날수로 따지는 게 귀엽기 조차하다. 구세대이긴 하지만 우리 부부도 결혼식 날보다는 진지하게 사귀기 시작했던 날인 그 해 하지부터 계산하여 햇수를 세는데 금년에 25주년을 맞는다.
반의 반 세기를 같이 지냈고 마침 대학졸업과 함께 직장을 잡은 아들을 키워낸 대견함에 우린 스스로에게 기념선물을 하기로 했다. 이곳 하지 날에 동지를 맞는 뉴질랜드의 퀸스타운에 가기로 했다.
짐을 부치고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시어머님이 정신을 잃어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시동생의 음성 메시지를 들었다. 당장 여행을 포기했고 30분 만에 시아버님, 시동생과 통화가 됐다. 폐렴이라는데 고비는 넘겼으니 여행을 멈추지 말라고 했다.
일단 비행기를 갈아 탈 LA까지 가고, 어머님과 통화가 될 때까지 여행취소를 미루기로 했다. LA 가는 동안 시어머님은 의식을 회복하셨고 가는 목소리나마 여행을 계속하라고 명(?)하셨다. 결국 뉴질랜드 도착 후 회복된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걱정을 놓을 수 있었다.
뉴질랜드 입국 시, 짐 검사원은 남편의 부츠에 붙은 마른 진흙을 물로 씻어낸 후에 우리를 통과시켰다. 옆 사람은 세관신고서의 부츠 마크 란에 마크를 하지 않아 벌금 400달러를 물었다. 자국 자연환경보호라면 세계 최고라 할 뉴질랜드가 여행자 신발 하나 하나에 묻은 정체 모를 외국의 씨앗, 벌레 하나의 입국도 막는 것이었다.
그 노력은 우리가 가는 곳곳에서 보여졌다. 뉴질랜드 산 물건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여 식품점의 야채 대부분이 국내산이란 사인이 크게 붙어 있었다. 눈 덮인 채 웅장하게 펼쳐진 산맥, 맑은 호수와 하늘, 그것들과 살 부딪히며 걷는 산보 길을 즐기면서 자연을 지키는 그들의 노력이 감사하고 존경스러웠다.
토착민 마오리는 13세기에 정착한 폴로네시아인인데, 그들의 전통 세계관 ‘카이티아키탕아’는 인간과 자연계 사이에 깊은 혈연관계가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서로 관련이 있다는 믿음이다. 정치, 경제라면 대개 17세기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주류이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태고적 자연을 훼손 없이 미래 세대에게 전하려는 마오리의 정신이 주가 되어 뉴질랜드를 지켜가고 있었다.
저소음형 분사엔진, 선상 탱크식 화장실 등의 친환경 고래투어도 그렇고, 빙하 하이킹에서의 도구와 쓰레기에 대한 규칙, 여행자들이 토착 나무, 식물을 사서 심게 하는 프로젝트도 그렇고, 친환경 숙박소 등이 그 산물이라 하겠다.
시간 다투어 끝낼 일도 없고 머리 뒤통수를 은근히 잡아끄는 잔걱정도 내려놓은 채, 불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앉아 창밖의 눈 덮인 산맥 줄기와 호수를 바라보기도 하고 책도 읽고 산보도 하는 동안, 25년의 우리의 관계를 되짚어도 보고 앞으로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부모, 형제, 자식, 친지 등 주위사람들과 그들이 준 환경이 그동안 우리의 관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도움도 주었는가를 더욱 뼈저리게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다.
결혼관에서도 ‘카이티아키탕아’가 적용되어 주위사람과 환경에 큰 의미를 주면서 그들을 소중하게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과 그 구체적 방법도 생각되었다. 아, 이래서 이런 기념일들에 다만 몇 시간이라도 조용히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하면서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한 거구나 싶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니 미국학생과 사귀게 된 한국 유학생이 만나자고 했다. 자기들은 내일이면 만난 지 1,000일이 된다고 했다. 성격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어 부족과 문화적 차이 때문에도 자주 싸운다며, 우리의 25년 긴 만남에 감탄하며 비결을 물었다. ‘카이티아키탕아’를 얘기해주었다.
김보경 / 대학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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