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복음중앙교회>
인류 역사 가운데 수 많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방면에서 남다른 카리스마를 가지고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빛과 그림자는 역사가들의 의해 평가되고 알려지기 마련이고 그로 말미암아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이 번에 소개하는 인물은 고국 조선 왕조 시대에 족벌간에 벌어진 정쟁비사에서 꽃다운 16세 나이에 사약을 받고 원통하게 죽은 “단종”(1441-1452) 임금의 한 많은 사연을 소개코자 한다.
그는 4대 임금 ‘세종’(1418-1450)에 이어 ‘문종’(1450-1452)이 왕위를 계승 하였으나 몸이 허약하여 2년2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뒤이어 11세 나이로 “단종”(제위1441-1457)이 조선의 제6대 임금(제위1452-1455)에 올랐다. 그러나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뒤에 세조, 4월 12일자 칼럼에 소개됐음)과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등의 왕족과 의정부 간의 실력 대결로 갈등이 노골화 되었다. 숙부인 ‘수양대군 일파는 먼저 1453년 10, 10, 밤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을 비롯, 김종서 등, 영의정 병조 판서 등을 철퇴로 죽이고 대신, 대군, 인척 등 장애가 될만한 사람들을 거의 죽이거나 유배시켰기 때문에 이제는 수양일파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영의정 등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모든 권한을 휘두르니 단종은 허수아비와 다름 없었다. 이러한 사태에 압박감을 느낀 어린 단종은 한명희, 권람 등의 강요로 더 이상 용상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1455년 6월 2일 수양대군에게 왕권을 넘겨주고 상왕이 되었다.
이렇듯 비합법적이고 악랄한 수법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뜻있는 선비들이 거세게 반발하였으나 역부족으로 처형되고 무서운 무단정치는 반대파에게 가혹 했다. 1456년 성삼문을 비롯 사육신이 중심이 되어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려다 김질의 배반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가고 노산군으로 낮추어졌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단종을 왕위에 올리려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고 단종은 다시 평민으로 강등되고 자살을 강요당해 1457년 12월 24일 16세 때 영월에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후 200여년 후인 (숙종7)에 신원되어 대군에 추봉되었고 1698년(숙종24)에는 임금으로 복위되어 “단종”이라는 묘효를 받았다. 능은 영월 장릉에 있다.
고국의 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의 정치사도 권모술수와 약육강식의 연속이었고 그들의 과욕은 비극의 극치를 보여 주었고, 재벌간의 재산 싸움을 보면서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다”(야1:15)는 성경의 교훈처럼 빈 손으로 왔다 빈 손 들고 가는 인생 여정인데 동포 사회서도 인생의 덕목은 자기를 깨뜨리고 겸손하며 욕심내지 않고 서로 돕는 삶이 될 때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의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요(벧후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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