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택
바다가 보고 싶어 바닷가에 갔다가 바다는 보지 못하고 그림 속에서 바다를 만났습니다.
여름에는 바다를 한번 보아야 직성이 풀려 올 해도 딸네 식구들과 함께 바닷가엘 다녀 왔습니다. 아이들은 바다를 보자마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파도에 뛰어듭니다. 그렇지만 난 쉽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바다와 나 사이에 너무나 많은 장애물들이 널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 많은 인파, 알룩달룩 파라솔과 towel들, 아슬아슬하게 가린 여체들, 모래 밭 여기저기서 공을 주고 받으며 웃고 뛰노는 젊은이들….
이 곳에 오기 전 혼자 머리 속에서 그려보던 바다 풍경 속에는 이런 장애물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대신 저 멀리 흰 돗단배가 지나가는 수평선, 줄지어 밀려오는 파도, 끼룩끼룩 갈매기의 비상……이런 것들만 생각하던 내가 여기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잠깐 현기증 마저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이 인파가 전혀 싫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재미있게 잡담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빠알갛게 탄 피부로 백사장을 나올 때, 마음은 아직도 허기진 채였습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아무리 하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그들 둘 만의 시간을 갈망하듯이 나는 바다와의 밀회를 엿보았습니다.
저녁 먹고 지방 신문을 뒤적이다가 와이어스(N. C. Wyeth)의 그림 특별 전시가 근처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는 소식에 눈이 번쩍 띠었습니다. 전시 작품 중에는 유명한 <거인(Giant)>이라는 그림도 들어 있고요.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바로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식구들을 바닷가에 내려 주고 나는 그 전시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림 <거인(Giant)> 속에는 여섯 명의 아이들이 여름 해변가에서 모래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시새 밭은 이 애들 만의 독무대입니다. 아이들은 모래 놀이를 하던 그 포즈로 하나같이 저 쪽 수평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파란 하늘에는 하얀 뭉게 구름이 높이 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그 뭉게 구름은 큰 거인 모양입니다. 순수한 마음의 어린이들의 눈에 비친 구름 환타지 입니다. 그 구름 거인은 길다란 몽둥이를 어깨에 메고 수평선을 밟고 하늘을 가로 질러 성큼성큼 걸어 갑니다. 수 천년전 호머 라는 시인이 읊었던 오딧세이 신화 속의 거인입니다. 전설의 세계가 아이들 에게는 한 낮 하늘에 펼쳐집니다.
어린 시절 여름 날의 뭉게구름을 바라 보며 꿈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학생시절, 여름 방학 이면 가던 시골 외가의 추억이 있습니다.어느날 모두 논 일 밭 일 나가고 나만 홀로 집에 남게 되었습니다. 개는 입을 헤 벌리고 낮잠에 빠져있고 시간조차 더위에 쉬는 것 같았습니다. 유독 매미만이 힘차게 울어대는 그런 한 낮이었죠. 나는 정자나무 그늘 밑 대나무 침상에 등을 대고 누웠습니다. 잠이 어린 눈으로 뭉게구름을 바라보았습니다. 구름들이 내 생각하는 대로 벼라 별 모양으로 변해 갑니다. 사람 얼굴도 되었다가 독수리 날아가는 모양도 되었다가 곰도 되고 개도 됩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났습니다. 저녁에 식구들이 다 모여 식사할 때, 하늘은 황혼에 유난히 빨갛고 뭉게구름은 저 높이 떠 있었습니다. 갈매기 때들이 간간히 끼욱끼욱 날아 다닙니다.
주위를 돌아 봅니다. 식구 중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른들은 사는 얘기 열중해 있고 큰 손자는 거미 사람(Spider Man) 책에 열중해 있고 둘째는 게 함정(Crab Cage)를 들었다 놨다 하며 잡힌 게들 숫자세기에 바쁩니다. 나는 둘째 놈에게 다가가서 하늘의 구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야 저 구름 좀 봐라. 뭐 같이 생겼지?” 이 놈은 고개도 들지 않고, “I don’t care(관심 없어요)"라고 합니다.
사실 요즈음은 애들도 바쁩니다. 공부, 운동은 잠깐 제치고라도 전자 Game, Card 놀이, 책, 영화, TV 등등이 주위에 널려있어 하늘 쳐다 볼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너무 많은 놀이들에 치여있는 이 애들, 장난감 하나 없어 구름과 놀던 나, 그 둘 중 누가 더 마음의 부자일까 생각해 봅니다.
하여간 나는 바다가 보고 싶어 바닷가에 갔다가 그리워하던 바다는 보지 못하고 미술관에 가서야 애인 같은 바다를 보았습니다.
- 끝 -
P/S : Wyeth 그림들은 필라 근교, Longwood Garden근처 Brandywine의 Wyeth전용미술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들 3대에 걸친 작품들이 영구 전시되어 있습니다. info@awyethgalle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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