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가면 꼭 이용하는 지하철에서의 일이다. 붐비지 않는 한가로운 낮 시간, 지하철은 어느 때보다 쾌적하고 한낮의 불볕을 피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도 하다.
얼마를 지났을까. 20대 중반의 장애우가 목에 안내문을 걸고 열차에 오르더니 한장씩 종이를 나눠준다. 몸이 불편하고 언어장애마저 가진 불우한 현실에 자립할 수 있는 희망을 달라는 일종의 호소문. 그리고 부채를 팔고 있었다. 천원과 함께 부채를 사고 감사하다는 답례를 받았다.
그리고 10분 후, 다리를 저는 70대 할머니 한분이 지하철에 올랐고 할머니는 죽은 아들과 도망간 며느리, 그리고 자신이 돌봐야 할 두 손주 이야기가 빽빽이 적힌 메모를 나눠주며 껌을 판다. 역시 지갑 속 천원을 꺼내 할머니께 드렸다.
그 할머니 이후에도 40분 동안의 지하철 여행에서 나는 두 명의 행상인을 더 만났고, 만능 접착제를 파는 아저씨의 삶에 대한 패기에 넘어가 다시 천원을, 요술처럼 바늘귀에 실 꿰어주는 작은 도구의 깜찍한 매력에 넘어가 2천원을 꺼냈다.
결국 시원한 냉방차량 안에서의 조용한 독서 계획은 장애우와 할머니, 두 아저씨들에게 전체 5천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도착역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든 순간, ‘잡상인은 불법입니다. 물건을 사지도 기부하지도 맙시다’라는 열차 안 전광판 캠페인을 보았다. 뜨끔했다. 네 명을 만났고 5천원을 써버린 나는 불법을 용인하고 가담한 주체가 되어 버린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 이후에도 지하철은 피할 수 없는 대중교통이며,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는 행상인 또한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애끓는 속사정에 대한 이야기는 책에 얼굴을 묻고 못들은 첫 시침을 떼기에는 지나치게 가련하며, 그들의 손에 들린 잡다한 소품들은 그 탄생과 용도를 듣고도 모른 척 잡아떼기에는 기가 막히게 재미있다.
지하철 잡상인을 규제하는 데 대한 법적 근거는 일단 뒤로 하자. 그 이유는 생존을 위해 행하는 모든 것은 언제든지 정당하기 때문이다. 남의 물건을 가로채고 사람을 해치지 않는 이상 모든 이의 생존을 위한 행위는 법정에 선 법관의 권위와 비교해도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그들은 다리품을 팔아 살 사람을 찾았고, 물건을 팔기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호소문으로 만들거나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그들의 상행위 역시 노동으로 정당히 치환되어야 하고, 그곳이 지하철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노동은 대기업 사무실의 노동과 동등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지하철 내 질서와 쾌적한 공공 환경을 방해하는 불법 잡상인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나의 입장을 정리하게 이르렀다. 몸이 불편한 장애우나 노인들이 거리로 나와서 돈을 벌수밖에 없는 사회적 복지장치의 약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이다.
장애우와 노인은 물리적으로 약자이다. 자신의 몸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박스를 안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며 시종일관 눈치와 긴장 속에 상품을 파는 어느 가정의 가장들 역시 빈곤층에 속한다. 그들이 일률적으로 대중교통법에 의거하여 불법으로 처리되게 하고, 그 이유 때문에 지하철에서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그들의 노동에 대한 차별에 동조하는 것은 아닐까.
지하철 불법 상행위를 독려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지하철에서 만나는 누군가의 어머니, 아들, 아버지들의 생존권과 존엄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는 취지였다.
<문선영 퍼지 캘리포니아 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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