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진화한다. 표준어법만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던 때는 지난 것 같다. 요새는 암호 해독 수준을 요하는 단어들이 자고 나면 수십 개가 생긴다. 거기에 사투리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내 경우 거친 사투리를 쓰는 남쪽 출신이라 늦은 나이에 수도권으로 진출하면서 사투리 액센트가 튀어나오지 않도록 애썼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당수의 사투리 단어들이 온 국민들에게 애용되고 있다. 그만큼 언어의 진화는 필수적인 사회현상이다.
그 중에 하나가‘짠하다’는 말이다. 전라도에서‘짠하다’그러면 마음이 참 안됐다, 라는 의미다. 이 말이 전국구가 되면서 약간 오용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닌데, 서울사람들이 그 말을 쓰고 있으면 좀 어색할 때가 있다. 그래서 그쪽 출신들은 안다. 이 단어 사용의 정확한 처소가 어떤 덴지를.
어쨌든 지난 주말 우리 부부는 그 전라도식의 짠한 경험을 완벽하게 했다. 막내 아이를 LA에 소재한 한 대학에 떨어뜨려 놓고 오면서다.
아들은 지네 누나와는 두 살 차이에 불과하지만 유난히 아이 같았다. 막내 아니랄까봐 모든 면에서 의존적이었다. 챙겨주기보다는 챙김을 받는 쪽이다.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면이 강하다. 또 매사에 적극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다. 그런 걔를 이곳에서 6시간이나 떨어진 대도시의 한 구석에다 던져놓고 오니 마음이 어땠겠는가. 정말 마음이 짠했다.
아이가 간 학교는 기독교대학이다. 잘 알려진 대형 사이즈의 대학도 아니다. 신생 대학으로서 아주 소규모다. 장래에 목회자가 되겠다면 그 학교 가라, 아님 그냥 일반대학 가라, 이러면서 서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목회의 길을 가겠다고 결정하자 우리도 아이의 결정을 순순히 따랐다. 한번 필이 꽂히면 거의 안 바뀌는 걔의 고집스런 특성을 알고 있기에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봤더니 낙심 천지였다. 신생학교여서 캠퍼스다운 캠퍼스도 없었다. 시스템이 잘 짜인 기숙사는 있을 리 만무다. 아이가 거주할 곳은 한 작은 집이었다. 화장실 하나에 방 세 개 딸린 곳에 무려 일곱 명의 남자아이들이 같이 지내야 한다.
그날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부하기 힘든 뭔가가 저 밑에서 올라왔다. 일단 냄새였다. 아무리 깨끗이 치워줘도 이상하리만치 걔 방에만 들어서면 맡아졌던 남아 특유의 냄새가 열배 이상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이고, 이런 데서 얘가 4년을 버텨야 해? 마치 굴 같은 그곳에 아이의 짐을 내려놓으면서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리고는 그런 쓴 마음과 함께 LA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행히도 다음날 부모들이 참여하는 오리엔테이션은 우리의 짠한 마음을 많이 녹여주었다. 비록 소규모지만 신앙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출발한 이 학교의 비전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어제 보았던 어질러진 아이의 방도 다음날 가보니 나름대로 잘 정리되어가고 있었다(냄새는 여전했지만). 필요한 장 더 봐주고 저녁밥 사주고 이내 헤어지는 시간이 되었다. 나와 아이는 남자라는 자존심 때문에 애써 눈물을 참았다.
하지만 아내는 아니었다. 아내의 눈은 금방 빨개졌다. 더 이상 있으면 뭐하랴… 아낸“아들, 잘해!”, 난“집에 자꾸 오지 마. 잡 얻어서 돈 벌며 공부에 전념해”, 이렇게 말하곤 금방 돌아서서 출발해버렸다. 이상한 침묵이 차 안에서 흘렀다. 그리고 그 침묵의 무게는 집으로 돌아오는 하이웨이 5번의 어둔 밤공기를 세차게 갈랐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평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아들도 그러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진지한 공부의 양과 질에 휩쓸려 집 생각 할 겨를도 없어보였다. 여기까지가 선배들로부터 말로만 듣던 엠프티 네슬(empty nestle)의 짠한 경험의 전부다.
이 대목에서 창세기의 한 말씀이 생각난다.“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이 구절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걸로 되어있지만 이런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부모를 떠나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해석! 아무튼 애로만 보이던 아들도 이제는 남자 되는 길에 들어선 것 같다. 지난주를 기점으로. 그래서도 짠해도 해야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인 것 같다. 부모와 헤어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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