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가운 여름 햇살에 달아오른 지면이 한창 열기를 뿜어대던 8월 어느 오후. 점심시간 뒤의 나른한 정적을 깨고 내 사무실과 잇대어 있는 실험실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파운틴이 어디 있지요?”
허름한 차림의 늙수그레한 낯선 백인 남자가 실험실 한가운데 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실험실로 잘못 찾아든 다른 부서 방문객이려니 여겼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뇌었다. “파운틴이 어디 있지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깊게 주름진 그의 얼굴에서 삶의 곤고함이 묻어나왔다.
“파운틴이라구요? 아! 물을 찾는구려.”
나의 응답에 무표정하던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씽긋 웃어보였다.
그를 식수가 있는 런치 룸으로 막 안내 하려할 때, 로비에서 회사 방문객 출입을 통제하는 알리스가 헐레벌떡 실험실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다짜고짜 낯선 백인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왔어요?”
그는 알리스를 향해 같은 말을 세 번째 되뇌었다. “파운틴이 어디 있지요?”
알리스는 그의 질문에는 아랑곳없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당신 미쳤어. 어디 와서 물을 찾고 있는 거예요?”
조용하던 실험실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새어나가자 실험실 맞은편 사무실의 공장 담당 부사장 레난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끼어들었다. 남미계인 그는 지극히 사무적이며 매몰찬 성격으로 부하 직원 사이에 소문이 나 있다. 레난은 알리스와 백인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알리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그는 그녀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도대체 근무를 어떻게 했기에 이 자가 예까지 무사통과 했느냔 말이요?”
알리스는 거의 울상이 되어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안에서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출입문이 열릴 수가 없는데… ”
레난이 그녀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열릴 수가 없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는 거 아니요. 잠금장치에 이상이 발생했다면 경비 담당 데이빗에게 즉각 보고해서 고치도록 했어야 옳지. 데이빗 당장 불러와.”
데이빗이 죄인처럼 어깨를 잔뜩 늘어뜨리고 실험실에 들어섰다.
“이 봐. 로비 출입문의 잠금장치가 작동하는지 지금 당장 가서 점검 해봐요.”
소란이 지속되는 동안 모두에게 잠시 잊힌 존재가 되었던 백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파운틴이 어디 있냐고요?”
“파운틴이라니? 경찰을 부를까? 무단 침입자로 제꺼덕 유치장 신세야. 당신 오늘 운이 억세게 좋은 줄 알아요.”
무단 침입자를 향해 일장 훈시를 늘어놓은 레난이 알리스와 데이빗을 향해 소리쳤다.
“뭣하고 있어. 이 자를 당장 내보내지 않고!”
등을 떠밀려 밖으로 쫓겨나간 침입자가 뒤를 힐끗 돌아보며 중얼댔다. “난 목이 마르단 말요.”
그 순간 책상 서랍에 항상 서너 개 넣어두고 마시는 병 물이 퍼뜩 떠올랐다. 병 물을 하나 집어 들고 나는 잽싸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만치 뙤약볕 속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무단 침입자가 보였다. 나는 소리쳐 그를 불러 세웠다.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의 손에 물병을 쥐어주었다. 굳었던 얼굴이 풀리며 그의 바짝 마른 입술에 미소가 번졌다.
“고맙소. 버스에서 내려 이 근처에 있다는 쓰레기 재활용장에 일거리를 알아보러 가던 길이었소. 하도 목이 타올라 물 좀 얻어먹으러 문을 밀치고 들어간 게 그만 그리 됐소.”
물을 벌컥벌컥 들이 마신 목마른 침입자는 나를 향해 손을 내내 흔들며 사라졌다.
황시엽 W.A.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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