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며 건강관리를 잘 하시던 분이 진료실에 오셨다. 80세쯤 되는 이 분은 건강식을 하고 운동도 많이 하며 젊게 살아오셨다. 그런데 가족들의 말로 이 분이 요즘 들어 기억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자주 넘어지셨다.
환자에게 걸어보시라고 했더니 발을 넓게 벌리고 종종 걸음으로 불안하게 걸었다. 기억력 검사도 좋지 않게 나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노인성 치매와 쇠약증이겠거니 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아 입원을 시켰다.
입원 후 촬영한 머리 사진에서 뇌수종이 발견되었다. 6, 7개월 전 넘어지신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뇌수종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만약 단순한 노인성 치매로 진단을 내렸다면 치료 기회를 놓칠 뻔했다.
우리 뇌와 그에 연결된 척추신경은 두개의 얇은 막으로 싸여 있는데 그 사이에 뇌척수 액체로 차있다. 딱딱한 두개골 안에 부드러운 조직인 뇌가 뇌수라는 액체에 둘러싸여서 살짝 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뇌가 두개골 안에서 뇌수에 떠 있기 때문에 1400gm 이나 되는 무거운 뇌 조직이 밑으로 지나가는 신경이나 혈관을 압박하지 않는 것이다.
또 액체에 떠 있는 뇌는 갑작스런 충격이나 움직임에도 잘 보호가 된다. 동시에 뇌수는 뇌 조직에서 발생되는 노폐물도 제거해주며 각종 화학적 평형을 맞추어 준다.
뇌수는 뇌에 있는 세포에서 만들어져 뇌실이라는 공간과 연결된 관과 척추를 통해 계속 순환되며 다시 흡수가 된다. 하루에 약 500cc 정도 생성되고, 순환되며, 흡수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 생성, 순환과 흡수의 과정에서 평형이 안 맞으면 뇌수가 쌓여 뇌수종이 된다. 너무 많아진 뇌수가 뇌세포를 압박하게 되면 치매가 생기고, 걸음걸이가 불안정해지며 소변을 못 가리게 된다.
위의 환자는 가느다란 튜브를 뇌실에서 부터 복강으로 연결하는 시술로 뇌수압을 줄인 후 회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뇌수의 생성, 순환, 흡수 과정에서 평형의 비밀을 보면서 인간관계에서도 평형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사랑과 도움을 받고, 나누고 베풀 때 사는 맛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면, 그것은 돌고 돌아 더 큰 사랑과 축복으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렇다면 나는 사랑을 받으며 또 흘려보내면서 다른 이들과 사랑과 위로의 소통을 이루고 있는가?
먼저 나 자신에게 다른 이들로 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도록 닫아버리는 어떤 태도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비판적 태도이다. 부정적인 비판이 내 마음의 호수를 흐리게 하고 있음이 떠올랐다.
나의 실수는 웃음으로 가볍게 떨쳐버리고, 남을 인정하는 말과 사과의 말은 내 곁에 얼씬도 못하게 쫒아버렸었다. 다른 이의 약점을 덮어주지 못하고 언제나 성급하게 지적한 일들도 후회가 된다. 아울러 사람 보다 물질에 더 관심이 많았다. 사람을 얻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망각한 채 나의 머리는 물질에 더 쏠렸다.
돌이켜보면 나는 조물주와 주위의 좋은 분들에게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과연 내가 받은 만큼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잘 흘려보내고 있는지 다시 깊은 생각에 잠겨본다.
소리 없이 흐르는 깊은 강 같은 사랑을 흘려보내기 위해서는 양보하고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죽고 사는 일도 아닌 작은 일에 왜 나는 양보를 못했던가? 차라도 한잔 같이 하고 싶은 사람, 오래도록 알고 지내고 싶은 사람, 관대하고 부드러워 시원함을 주는 사람,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텐데….
<소학>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평생 길을 양보해야 백 보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평생 밭두렁을 양보해도 한 마지기를 넘지 않을 것이다.”
이제껏 넘치도록 받아 간직했던 사랑과 위로를 이제는 흘려보내야 하겠다. 기회를 만들어 사랑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메마른 삶에 아낌없이 흘려보내는 한해를 살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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