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수업 중 집에서 담아 온 군용 수통의 물을 살짝 마시려다 엎질러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고 말았다. 수업이 끝나고도 안절부절 못하며 자리에 꾹 박혀있는 나를 흘끔 훔쳐본 급우 A가 확 나발을 불어버렸다. “XX 바지에 오줌 쌌다.”
해명할 겨를도 없이 소문은 삽시간에 급우들에게 번져나갔다. 나는 창피하고 억울하고 속상해서 죽고만 싶었다. 물과 오줌도 구별할 줄 모르는 밥통 같은 A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수군대는 급우들이 그렇게 야속하고 미울 수가 없었다. 다행히 진실이 먹혀든 탓인지 어쩐지 소문은 솜에 흘린 물처럼 얼마 가지 않아 잦아들었다.
예나 제나 소문에 상처 입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대하게 된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한 친지의 하소연을 얼마 전에 들었다. 기혼 남성과는 말상대하기조차 두려워졌다는 것이다. 최근 그녀가 다니는 교회 안팎에 나돈 뜬금없는 소문 탓이었다. 반듯한 외모 못지않게 행동거지도 반듯한 그녀는 “남편 단속 잘 해야겠어?”하며 쑥덕대는 ‘아내들’ 때문에 독신녀들만 상대하기로 작심했다며 눈물을 보였다.
소문은 진위야 어찌됐든 남의 말을 뒤에서 하는 데서 비롯된다. 상대가 듣지 못한다는 판단이 서면 앞에 대놓고도 한다. 제대 뒤 대학 복학을 하고 K와 Y 두 친구와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청평 행 기차를 탔을 때의 일이다.
청량리 역에서 기차를 탔다. 피서객으로 붐볐으나 우리는 용케 자리를 차지하는 행운을 잡았다. 더구나 자리 맞은 편에는 모 여대 배지를 단 여대생 세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착석하기 직전 K가 나와 Y의 귀에 조그만 소리로 당부했다. “나 하는 대로 따라해!”
자리에 앉자마자 K가 느닷없이 수화를 하기 시작했다. 구화학교 교사인 친구로부터 몇 가지 수화를 익혔다지만 K의 수화는 의미 없는 손동작일 뿐이었다. 나와 Y는 K의 의도를 눈치 채고 수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수화는 여대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얘 네들 벙어리잖아!”
“멀쩡하게들 생겼는데 참 안됐네.”
우리들은 간간히 수화 연기를 해가며 세 여대생들이 엮어내는 ‘우리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게 되었다. 새침데기 같던 그녀들은 우선 세 남자에 대한 인물 촌평으로 서두를 열었다. K는 야무지고 잘 따지게 생겨 말만 할 수 있다면 변호사 감이라며 동정을 표했다. 선글라스를 낀 K에게는 ‘색안경’이란 즉석 별명이 주어졌다. 코가 큰 Y에게는 사내답다는 평과 함께 ‘코’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착실하게 생겼는데 데모하다 며칠 감방엘 다녀왔는지 턱수염이 꺼칠하네.”
나는 ‘꺼칠이’로 불렸다. 색안경, 코와 꺼칠이를 오락가락하며 그녀들은 풍성한 화제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녀들의 대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오늘 얘 네들 하고 한번 어울려 볼래? 뒷말 없고 소문 안 낼 테니 좋잖아.”
그녀들이 우리를 상대로 찧고 까불고 해대는 동안 청평에 다다랐다. K가 찡끗 눈짓을 하더니 그녀들을 향해 참았던 입을 열었다. “소문 안낼 테니 우리 같이 놉시다.”
그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당황해 하던 세 여대생의 모습이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남의 말 하고 듣는 재미를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 뒤에서 나눈 남의 말은 재미로 끝내고 덮어두어야 한다. 말이란 돌다보면 개인감정으로 각색이 되어 나쁜 소문이 되기 쉽다. 소문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일이다. 소문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꼼짝없이 그 피해자가 되고 만다.
“남의 말도 석 달”이라는 속담이 있다. 제아무리 크게 퍼진 나쁜 소문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는 뜻이다. 혹시 나쁜 소문이 ‘자신이 뿌린 씨의 열매’ 같다면 쓴 게 보약이라 생각하고 달게 삼켜버리면 좋을 것이다.
“험담은 하지도, 전하지도 말자.”
내가 속한 한 모임의 올해 표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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