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외신의 머리기사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발생하고 있는 소요사태다. 이스탄불의 중심 구역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중앙정부의 계획에 반발한 시민들이 연일 데모를 벌여 터키 정국을 뒤흔들고 있고, 급기야는 터키가 가입을 원하는 유럽연합까지 앙카라 중앙정부의 데모 대 무력사용을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는 터키라고 하면 6.25동란 때 미국, 영국, 캐나다 다음으로 많은 군인을 파견해 미국 다음으로 가장 늦게까지 군을 주둔시켜 주었던 혈맹의 나라로 기억하고 있다. 재개발을 둘러 싼 소요사태가 곧 진정되기를 기원하면서 이스탄불시가 세계사 적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본다.
터키인의 조상은 중국의 수와 당나라 당시 중원의 북방과 한반도의 북방민족인 말갈인들 거주지역 서쪽에 살고 있던 돌골족이다. 따라서 그들의 조상은 우리와 같은 동양인이다. 그 후예들이 중앙아시아의 대회로를 따라 지금의 소아시아까지 수백 년간 민족의 이동을 했다.
이후 1299년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오스만 제국이 세워지고, 7대 술탄인 메흐메트 2세가 전대미문의 신무기인 대포 60문을 앞세워 1453년 5월29일 난공불락의 천년성인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향후 세계사의 향방을 ‘완전히’바꾸어 놓았다.
정복자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명하여 버린다.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과 그리스가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유럽대륙에 이슬람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된다.
이로써 기독교를 공인하여 첫 기독교신자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기리기 위해 337년 명명된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1,000여년의 영화를 뒤로하고 멸망하였을 뿐 아니라, 동과 서, 중국과 로마를 이었던 무역로 실크로드가 폐쇄되고 만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당시 해양세력들은 동쪽으로 가는 육로와 해상로가 막히자, 서쪽으로 항로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39년 후 동방을 찾아 나섰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1492년 10월12일 지금의 바하마 군도 가운데 산 살바도르섬을 발견한다. 신세계가 전개되고 인류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1492년은 1453년이 만들어 낸 결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최근까지 1492년만 알고 있었을 뿐 ‘1453년’을 알고 있지 못했다.
한국 역사 교과서가 승자의 편 다시 말하면 힘 있는 사람들이 쓴 정사를 중심으로 쓰여 졌고, 한족의 주거주지 중원을 중심으로 쓰여진 동양사 그리고 그리스, 로마 등 서구를 중심으로 기술된 서양사 때문에 그 반대세력이었던, 중국의 만리장성 북방의 ‘오랑캐’라던가,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서양세력의 반대편에 섰던 이슬람교 신봉국인 페르샤 왕국이나 오스만 제국에 대하여 별로 기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남북미 대륙이나 호주, 극지방의 원주민들의 역사에도 해당되는 일이다.
그러한 상황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역사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게 하려면 반대세력의 역사도 가르쳐야 한다는 교훈을, 엄청난 파급효과를 지녔던 ‘1453년’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1453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상은 어떠하였을까 상상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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