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직접 임명 하기에
북 대표 직급, 큰 의미 없다”
배는 뜨기도 전, 좌초했다. 돛대만 높이 올려놓고 한반도란 배는 다시 냉전의 늪으로 돌아갔다. 한반도 정세의 전환점이 될 거란 기대감을 높였던 남북 당국간 회담은 무산됐다. 회담 대표의 격(格) 문제를 둘러싼 이견 때문에 민족의 진운은 다시 휴전선을 넘지 못했다.
남북 고위급 대화의 산 증인. 통일부 장관을 지낸 박재규 경남대 총장(69)이다. 14일 우드로 윌슨센터와 경남대가 공동으로 개최한 제4차 포럼을 위해 워싱턴을 찾은 박 전 장관을 만났다. 분단 반세기의 문을 열었던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추진위원장으로, 남북 장관급 회담의 수석대표로 평화통일의 험로에서 정열을 쏟아왔던 그는 남북회담 무산의 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크게 세 가지를 지적했다. “북한에서의 장관급이란 그 회담 시기에 맞는 사람을 최고지도자가 직접 임명하는 것인 만큼 직급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한국 정부의 유연성 부족을 꼬집은 그는 이달 말로 예정된 한중정상회담을 전후해 남북회담의 재개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6자회담과 남북회담을 병행해서 계속 추진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박근혜-김정은 정상회담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박 전 장관과의 일문일답.
한-중정상회담 전후해 회담 재개여부 결정날 것
비핵화는 결국 남북정상회담서 해결해야 할 문제
남북문제는 시간·인내 필요$박 정부, 서두르면 안돼
-이번 남북 당국자회담의 무산 책임은 어느 측에 있다고 보나.
난 무산이 아니라 연기라고 본다. 북측은 남북 관계개선을 위해 회담을 먼저 제안하는 등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만큼 책임이 남측에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회담이 완전 무산되면 그들(북한)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북측이 책임을 추궁하는 이유를 나는 다시 상호 조정을 통해 머지않아 다시 회담을 열자는 뜻으로 보고 있다.
-북측 주장대로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장관급으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터무니없는 억지인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장관급회담이면 서로 장관이 만나면 된다. 그러나 남과 북에 있어 직급은 큰 의미가 없다. 우리가 요구해온 김양건 통일전선부 부장이든, 종전의 김용순 대남 비서이든 대남 총괄업무를 맡고 있을 뿐이다.
내 경험상 북측 회담의 대표자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최고 지도자(김정은)가 지정하는 사람이 나온다. 1차 정상회담 준비 시에는 전금진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겸 내각참사가 장관급(북에서는 상급)회담 대표로 나왔다. 북에서의 이른바 ‘상급(장관급)’은 그 시기에 맞는 사람을 최고 지도자가 지시해 임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급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국제적 기준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입장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처사 아닌가.
이는 북한의 시스템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실정을 모르고 우리 방식, 기준으로 받아들이면 무시당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차 정상회담시 전금진이 ‘내각 참사’로 상급대표로 나올 때도 왜 김용순 대남 비서가 나오지 않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강지영 국장이 대표로 발탁된 것도 최고지도자의 지시에 따른 것이며 사전에 일정기간 준비를 시켜 내보냈을 것이다.
-회담 대표의 급의 문제는 매번 논란의 소지가 컸는데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남북 공히 한쪽의 양보를 바라면 시간만 잡아먹을 뿐이다. 우리가 양보해주고 북도 다른 인물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이번 사태는 남북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시간을 갖는다는 점에서 나쁘지만은 않다.
-남측이 유연성 있게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조급하게 성과를 내려다보니 미숙하게 대처했다는 지적이다.
남과 북의 문제로만 보면 한국 정부가 서두르는 게 아닌가 하는 시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북의 회담 제안 직전에 미-중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었고 북핵문제가 의제가 될 거란 게 알려졌다. 의도적으로 보이니까, 그래서 우리도 미중 정상회담 전에 빨리 회담제안을 받자는 거였다. 이달 말 열릴 박근혜-시진핑의 한중정상회담의 중요의제도 북핵이 될 것이다. 박 정부는 정상회담 전에 남북회담의 성과가 있길 바랐을 것이다. 그래야 시진핑과의 회담도 화기애애하게 상호 협력적 분위기로 갈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청와대와 정부의 외교안보라인을 강성파가 장악한 점이 회담 무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박 대통령의 안보라인에 군 장성 출신들이 많아 그런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군 출신들은 평생을 계급사회에서 살아온 분들이다. 회담 대표의 격이 안 맞으면 무시당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을 수십년간 연구, 상대해온 사람들이 보면 최고 지도자가 대남 부서 일꾼들 중에서 ‘당신이 대표 계급장 달고 나가보시오’하면 끝이다. 그게 북한 시스템이다.
-북한이 5년 만에 느닷없이 대화의 장에 나온 이유는 뭐라 보나.
북은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경제 건설과 핵 보유라는 ‘병진 노선’을 밟고 있다. 핵 문제는 6자회담과 북·미 대화로 풀고, 경제 문제는 박근혜 정부와의 남북 협력으로 풀겠다는 투트랙 전략이다.
박근혜 새 정부가 대화 의지를 계속 밝힌 데다 중국도 북미대화와 6자회담의 재개를 위해서는 먼저 남북관계 개선을 주문했을 것이다. 최룡해 특사의 방중에서 중국의 기류를 읽고서 중국의 입장도 들어주고 남과도 개성공단과 금강산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을 거라 판단하고 대화를 제의한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회담의 장소와 시기는 남에 맡긴 것이다. 그 대신 의제는 자기들이 맡고서 비핵화 문제 같은 건 빼버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맞는 최고 책임자를 회담 대표로 내세웠는데 남과 서로 생각이 달라 일이 틀어진 것이다.
-남북회담은 언제쯤 재개될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영영 무산되는 것 아닌가.
북은 회담 재개를 위해서는 우리의 양보를 바라든가 아니면 기싸움으로 계속 끌고 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할 것이다. 그 결정의 시기는 이달 말의 박근혜-시진핑 한중정상회담 전후가 될 것으로 본다. 만약 회담 직전에 재개되면 이는 북의 입장을 강화하는 차원으로 시진핑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도 있다.
-박근혜 정부가 공언해온 것처럼 비핵화 문제를 한쪽에 제쳐두고서 남북대화와 교류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보나.
북과 중국은 6자회담의 틀 속에서 북핵문제를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한국과 미국은 북핵 해결의지가 안 보이면 6자회담이 회담을 위한 회담, 비생산적인 회담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있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 나는 북핵문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북의 설득을 위해서라도 남북회담과 6자 회담을 병행해서 계속 진행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 통해 신뢰가 쌓이면 남북정상회담을 열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김정은을 만나 핵을 두고서는 외국기업 투자나 유치가 어렵고 당신들 경제발전도 힘들다고 인간적으로 설득해야 한다고 본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 나아가 통일의 길을 위해 박근혜 정부에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현실에 맞는 정책이다. 대북정책은 우리의 뜻대로, 일방적으로 되지 않는 현실 위에 놓여 있다. 북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앞으로 4년여 동안 남북이 상호협력해 신뢰를 쌓는 정도로 가야 한다. 박 대통령 집권기간 내에 비핵화 관철은 어렵다. 너무 욕심내선 안 된다. 남북관계는 바닷가의 모래성처럼 쉽게 쌓고 쉽게 허물어질 수도 있다. 머나먼 길이다. 서두르지 말고 우선 신뢰를 쌓는 게 급선무다.
<이종국 기자>
■박재규 총장은
박재규 총장은 1970년대 초반부터 북한을 연구해온 통일 전문가로 ‘북한학 1세대’로 불린다. 1999년 12월부터 통일부 장관을 맡아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으로 준비작업을 총괄했다. 그 후 제1~4차 남북장관급회담의 남측 수석대표를 역임했으며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2003년부터 경남대 총장으로 재임 중이며 대통령자문 통일고문회의 고문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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