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한학기 남겨놓고 자원입대 한국전 참전
▶ 가장 치열한 격전지인 강원도 양구에서 전투
“프로야구 선수는 못되었지만 한국의 발전 가슴 뿌듯합니다”
“목숨 걸고 지켜냈던 그 나라. 이제 거리 곳곳에 삼성, 현대, 기아 등의 한국 상품이 넘치는 것을 보면 아주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합니다”
60여 년 전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길 마르티네즈(82세-시사이드 거주) 참전용사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선 한국의 모습에 큰 자부심과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프로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는 길 마르티네즈 씨는 커뮤니티 칼리지를 한 학기 남겨놓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당시 20세) 군에 자원 입대했다.
그리고 피의 능선전투ㆍ단장의 능선 전투ㆍ펀치 볼 전투ㆍ가칠봉 전투ㆍ도솔산 전투 등 6ㆍ25 당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였던 강원도 양구에 배치되었다.
마르티네즈 씨가 단장의 능선에 배치됐던 시기는 이미 유엔군과 북한군 간의 정전협정이 진행되고 있던 때여서 양측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고지를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펼쳐졌다고 한다. 특히, 1951년 9월 13일부터 한 달간 펼쳐진‘단장의 능선 전투’는 미 제2보병사단ㆍ프랑스 대대ㆍ네덜란드 대대가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강화할 목적으로 북한군 2개 사단을 공격해 점령한 전투로, 북한군 2개 사단은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고, 미군은 3개 고지를 모두 점령해 전선을 38도선 위쪽으로 전진시켰다.
마르티네즈 씨는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전투가 끝난 후 고지 정상에는 포로로 잡을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을 정도였다고 밝혔다.
이 전투에서 마르티네즈 일병은 소속 부대 하사관이 전사하자 그 자리에서 하사로 임관해 분대를 지휘했다. 그는“적군에게 대대가 포위돼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포탄에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아예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 전투에서 대대는 적 고지 탈환을 위해 산 정상을 공격하는데 적의 치열한 저항이 계속돼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때 적의 수루탄에 자신의 팔을 잃고도 부상병들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던 의무병을 회상했다. 결국 전사를 한 이 의무병은 미국 최고훈장인 의회 명예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1년 가까이 수많은 전투와 작전을 수행했던 그는 당시 같이 근무했던 한국인 노무자와 척후병들의 용기과 애국심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에 불 같은 것이 타오른다고 말했다.
작전지역이 산세가 험해 탄약을 일일이 800~900 미터가 넘는 고지까지 운반해야 했는데, 이때 한국인 노무자들은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도 탄약을 하나씩 메고 산꼭대기까지 운반했고, 그러다 포탄이 떨어지면 운반하던 폭탄까지 같이 터져 산화되던 그때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1년간의 치열한 격전을 마치고 1952년 귀국한 마르티네즈 씨는 전쟁에서 겪은 참혹함으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어 5~6개월간 술에 의존해 살았으나, 재활 프로그램으로 정상을 되찾았다고 한다. 전역 후 대학 공부를 계속해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학교 교사, 교장, 교육감 등 평생 교육계에서 일하고 1988년에 은퇴했다.
<이수경 기자>
해군대학원에 유학 중인 한국군 장교들로부터 받은 액자를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길 마르티네즈 한국전 참전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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