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아들을 뭐라고 합니까?” 어떤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무심코 대답한다. “그야 손자라고 하지!” 아들이 또 묻는다. “손자의 손자는 뭐라고 합니까?” “그건 현손(玄孫)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버님, 현손의 현손은 뭐라고 합니까?” 여기에서 아버지는 말이 막혔다. “글쎄, 그건 모르겠다.”
기원전 2세기경 중국의 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왕자이며 재상이며 설(薛)이라는 지방 영주였던 정곽군(靖郭君) 전영에게는 수십의 처첩에서 난 아들만 40명이나 되었는데 그중 어떤 천첩에게서 낳아 눈에 띄지도 않던 아들 하나가 조용한 틈을 타서 아버지를 뵙고 묻는 것이다. 그 아들의 이름은 문(文)이라고 했다. 현손의 현손이면 내 아래로 몇 대 손자이냐? 그것을 뭐라고 부르는지 내가 어찌알겠나 싶어 아들을 의아스럽게 바라보자 아들은 자세를 가다듬고 말한다.
“아버님은 제나라의 재상이되어 왕 셋을 섬기는 동안 나라의 영토는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는데 아버지 개인 집에는 만금의 재산이 쌓여 있습니다. 지금 아버님의 후궁들은 비단옷 긴 치맛자락을 밟고 있는데 나라의 선비들은 짧은 무명 바지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의 첩과 노비들 밥상에는 쌀밥에 고기가 넘쳐나지만 나라에는 끼니도 못 때우는 선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장수의 문에는 반드시 장수가 있고, 재상의 문에는 반드시 재상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집 문하에는 한 사람의 현명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아버님은 여기에 재산을 더 쌓아서 그것을 이름도 모를 어느 자손에게 주려고 나라가 나날이 여위는 것을 잊으십니까? 제가 아버님을 위하여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듣고보니 맞는 말이다. 아들의 말에 깊이 수긍한 아버지는 다음부터 이 아들에게 집안일과 식객을 접대하는 일을 맡겼더니 일을 잘해서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다.
아버지는 그 많은 아들들을 제치고 천첩에서 난 이 아들을 자기 후계자로 삼았다. 이 아들 文이 전국시대 온천하에 명성을 떨친 맹상군(孟嘗君)이 된다. 맹상군은 자기 영지인 설(薛)땅에 널리 빈객을 모았는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든, 도망친 난민이든 모두 후하게 대접해서 식객이 3천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3천명 식객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던 모양이다. 맹상군이 진(秦)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진의 소왕(紹王)은 맹상군을 적당한 구실로 구금하여 억류 시켰다. 맹상군의 평판과 인물 됨을 알고 제나라에 되돌려 보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다급해진 맹상군은 소왕이 가장 사랑하는 총희에게 어떻게 힘을 써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그 여자는 “그렇다면 그 댓가로 흰 여우의 겨드랑이 아래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달라”는 것이였다. 그 갓옷은 천하에 하나 밖에 없는 보물로 이미 맹상군이 사신으로 왔을 때 소왕에게 예물로 드린 것이다.
그러자 계명구도(鷄鳴駒盜)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 처럼 개 훙내를 내며 도둑질을 하던 수행원 한 사람이 그 갓옷을 왕궁의 창고에서 기막히게 훔쳐내어서 그 총희에게 갖다주고 그것을 받은 총희는 소왕에게 간청을 하여 맹상군은 풀려날 수 있었다. 맹상군이 도망가는 도중 각 관문을 통과할 때는 문서위조 전문가가 또 있어서 통행증을 위조하여 통과했다. 그러나 마지막 관문인 함곡관을 통과하려는데 그 때는 날이 밝으려면 아직 먼 시간이었다.맹상군을 놓아준 것을 후회한 진 소왕은 다시 맹상군 체포령을 내려서 추격군이 이미 목전에 다달았다. 그러나 성문은 규정상 날이 밝아야 열린다. 모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닭 소리 잘내는 수행원이 또 있어서 “꼬끼오”하는 닭 소리를 그럴듯하게 내자 인근의 딴 닭들도 덩달아 울어버렸다. 그래서 성문직이는 날이 샌 줄 알고 성문을 열어서 맹상군 일행은 무사히 도망을 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맹상군과 식객의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많지만, 하나 만 더 인용한다. 맹상군은 자기 영지인 설의 주민들에게 춘궁기에는 곡식을 빌려주고 급하다면 돈도 빌려주어서 나중에 이자에 원금을 돌려 받고는 했는데 어느 때인가 빌려간 사람들이 빚을 잘 안갚는 것이다. 그래서 맹상군은 풍환(馮驩)이라는 식객을 보냈는데 이 친구는 가서 받아오라는 빚은 안 받아오고 대신 갚을 능력이 없다는 사람들의 빚만 모두 탕감해 주고 왔다. 그 많은 식객들을 먹여 살리느라고 항상 돈에 쪼달리던 맹산군은 당연히 노발대발. 그러나 맹상군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맹상군을 결사적으로 지켜 보호해 준 것은 그때 은혜를 입은 설의 주민들이었다.
풍환은 빚을 받아온 대신 주민들의 민심을 얻어온 것이였다. 꼭 전국(戰國)시대 뿐만 아니고 어느 시대이건 인재를 모으고 인심을 아우르는 것이 바로 최고의 국가 정책이고 최선의 생존 전략임을 궤뚤어 본 맹상군은 이왕 있는 富, 이것을 누구일지도 모를 자손에게 남기는 것 보다는 차라리 인재를모으고 주위의 인심을 얻는데 쓴 것이다. 전임 어느 대통령의 재산 환수 금액이 얼마인데 그 외에도 여기 저기 숨긴 돈이 또 얼마 있을 것이라는 보도를 보면서 필자는 “도대처 자손 몇 대나 먹여 살리려고 그 많은 돈을 숨겨 쌓으셨는지?” 한탄해 보았다.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知足不辱:지족불욕),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止不殆:지지불태). 노자(老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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